[책의 향기]서울대생→인민군 강집→탈출… 육필로 쓴 6·25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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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서울대 공대생의 한국전쟁/김형갑 지음/134쪽·8000원·역락

다음 주면 6·25전쟁이 발발한 지 어언 64년이 된다. 해마다 이쯤엔 관련 서적이 상례처럼 쏟아지는데, 올해는 전쟁을 직접 치른 군인들의 회고록이 많다. 공군 조종사로 참전해 당시 현장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이강화 장군(준장 예편)의 ‘대한민국 공군의 이름으로’(플래닛미디어)와 1950년 11∼12월 벌어진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던 미국 해병의 실화를 담은 ‘폭스 중대의 최후의 결전’(진한M&B)도 눈에 띈다.

그 가운데 ‘어느 서울대…’는 독특한 이력을 지닌 군인(?)의 이야기다. 저자인 고 김형갑 전 캐나다 매니토바대 교수는 1930년 전북 정읍 출신으로 서울대에 다니다 남침한 북한군에 강제 징집돼 ‘인민해방군’이 됐다. 낙동강 전선부터 두만강까지 이리저리 끌려 다녔으나 1952년 4월 원산에서 조각배를 타고 탈출해 다시 남한으로 돌아왔다. 휴전 이후인 1958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한평생 타향살이를 했다.

이 책은 원래 출판을 염두에 뒀던 글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김 교수가 세상을 떠난 뒤 유족들이 우연히 발견한 글을 정리해 세상에 내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문장이 다소 거칠고 분량도 짤막하다. 하지만 그런 약점이 이 글이 지닌 묵직한 힘을 가리진 않는다. 억울한 심정에 분노하거나 염세적일 수도 있는 상황이건만, 자신이 겪은 전쟁을 담담하고 진솔하게 전달한다.

저자는 육체적 고통도 컸지만 정신적 힘겨움이 더 버거웠던 듯하다. 하루 종일 행군과 사역을 한 뒤 지친 몸으로 매일매일 북한의 사상수업을 받는 일은 가혹한 고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의문을 품거나 실수하면 곧장 자아비판을 벌여야 하는 상황도 견디기 쉽지 않았다. 아이러니한 건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탈출한 남한에서도 ‘빨갱이’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고초를 겪긴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꿈에 그리던 복학도 인민군이었단 이유로 좌절됐다. 저자는 1993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뒤늦게 2012년 모교인 서울대로부터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사실 고인은 당시로선 운이 좋았다고 볼 수도 있다. 무작정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긴 했어도, 줄곧 후방 작업에만 투입돼 총부리를 겨누고 누군가의 목숨을 앗는 비극은 겪질 않았다. 수많은 미 함대와 공군의 포격을 겪었지만 크게 다친 적도 없었다. 본인도 “신기하다”고 말할 정도다. 하지만 꿈 많던 스무 살 젊은이에게 파리 목숨처럼 취급받으며 세상의 강압에 휩쓸렸던 시간은 이후 평생의 낙인으로 남았다. 그리고 6·25전쟁은 지금도 휴전 중이다. 어떤 거창한 명분을 내걸건 피눈물을 쏟은 건 민초들이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어느 서울대 공대생의 한국전쟁#6·25전쟁#인민해방군#김형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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