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이슈]‘재계의 본산’ 전경련 흥망성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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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년 6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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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플래시 피해 비공개 회동, 재계 맏형이 어쩌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왼쪽)가 1980년 4월 전경련 행사에서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담소를 나누고 있다(위쪽 사진). 정 
창업주(오른쪽)가 1987년 2월 구자경 럭키금성(현 LG)그룹 회장에게 전경련 회장직을 인계한 뒤 악수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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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왼쪽)가 1980년 4월 전경련 행사에서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담소를 나누고 있다(위쪽 사진). 정 창업주(오른쪽)가 1987년 2월 구자경 럭키금성(현 LG)그룹 회장에게 전경련 회장직을 인계한 뒤 악수를 나누고 있다. 동아일보DB
12일 오후 5시. 서울 영등포구 여의대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관 47층 회의실에서 전경련 회장단 회의가 열렸다. 세월호 참사로 한 달 미뤄진 정례회의였다.

대기업 총수들은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온 뒤 실무자들의 영접을 받으며 별도 엘리베이터로 올라갔다. 외부 노출을 피하기 위한 철저한 보안과 세심한 동선이 준비됐다. 회장단은 회의장에서 만찬을 하며 재계 현안을 논의했다.

저탄소차협력금제,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 등 당면 이슈는 물론이고 세월호 참사 이후 내수 침체, 환율 급등 같은 국가적 사안이 산적해 있는 상황. 이날 회장단 회의에는 경제계 관심이 쏠렸다.

하지만 회의 후 전경련은 “별다른 안건이 없었다”고 간단히 설명하는 데 그쳤다. 경제계에서는 즉각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 나왔다. 전경련이 전혀 목소리를 내지 않은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전경련은 한때 ‘재계의 본산’으로 불렸다. 재계를 대표하며 ‘빅딜(대규모 사업 교환)’ 등 산업계 구조조정까지 좌지우지했다. 하지만 최근엔 위상이 추락하며 ‘전경련 무용론’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오죽하면 이날 회장단 회의를 이전과 달리 전면 비공개로 진행한 것을 두고도 일각에서는 저조한 출석률을 감추기 위한 ‘궁여지책’ 아니냐는 뒷말까지 나온다.

실제로 회장단은 21명이지만 최근 회의의 참석자는 7, 8명에 불과하고 주요 그룹 총수들은 수년 동안 나오지 않고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회장단 회의가 완전히 요식행위로 전락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개탄했다.

전경련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전경련 흥망사’를 살펴봤다.

한국경제인협회로 출발


전경련의 시작을 얘기할 때 5·16군사정변과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빼놓을 수 없다. 쿠데타 직후 군부는 ‘부정축재를 단죄하겠다’며 경제인 13명을 구속했다. 일부 청년장교 사이에서는 ‘본보기로 총살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이때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나섰다. 당시 화살을 피해 일본에 체류 중이던 그는 구속을 각오하고 귀국해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을 만났다. 그리고 “잡혀간 이들에게 경제 건설에 참여할 기회를 달라”고 제안했다.

제안이 받아들여져 풀려난 이들을 중심으로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가 만들어졌고 이 창업주가 초대 회장을 맡았다. 이 창업주가 일생에 단 한 번 대외직을 맡은 것이 바로 한경협 회장이었다.

일본경제단체연합회(경단련)를 모델로 만들어진 한경협은 1968년 전경련으로 이름을 바꾸고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다. 기간산업 부흥을 위해 외자를 들여왔고, 산업단지를 건의해 공업화의 발판을 조성했으며, 기업들의 수출을 지원했다.

군사독재 시절을 거치며 전경련은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대기업을 육성하려는 정부와 산업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1980년대 초반 대통령 해외순방 때 경제인들이 동행하는 ‘경제사절단’이 구성되면서 밀월 관계는 더 깊어졌다. 전경련은 여권에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통로 역할도 했다. 선거 때마다 그룹별로 정치자금을 할당한 뒤 모아서 정치권에 전달했다.

전경련의 최전성기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회장으로 재임하던 시절(1977∼1987년)이었다. 정 창업주는 임기 중 전경련 회관을 지었고, 서울 올림픽 유치를 성공시켰다. 전경련이 ‘재계의 본산’, 전경련 회장이 ‘재계의 총리’라는 말이 나온 것도 이때였다.

전경련은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한국경제연구원, 자유기업원, 한국광고주협회 등 재계를 지원하는 각종 단체를 속속 출범시키며 영향력을 더욱 확대했다.

외환위기 거치며 위상 약화

하지만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대기업들을 ‘육성의 대상’이 아닌 ‘규제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전경련과 정부가 대립하는 일도 잦아졌다.

김영삼 정부가 ‘업종 전문화’를 내세우며 30대 그룹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자 당시 전경련 회장이었던 고 최종현 SK 회장은 강하게 반발했다. 최 회장은 “문어발이니, 업종 전문화니 하는 말은 에디슨이 전구 만들 때나 하던 얘기”라고 ‘돌직구’를 날렸고 SK 계열사들은 괘씸죄에 걸려 국세청과 공정거래위원회의 타깃이 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1997년 외환위기는 전경련에 치명타였다. 과거 지나친 재벌 중심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전경련 해체론’까지 제기됐다.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전경련을 ‘재벌 오너들의 사모임’ 정도로 보는 시선도 많아졌다.

내부적으로도 분열이 생겼다. 전경련은 1998년 초부터 김대중 대통령과 약속한 5대 그룹 사업 구조조정(일명 빅딜)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LG그룹이 울며 겨자 먹기로 반도체 부문을 현대에 넘기는 등 일부 그룹이 원치 않는 구조조정을 했다. 전경련 관계자는 “당시 주요 그룹 사이에서 앙금이 생기면서 이후 재계의 뜻을 하나로 묶는 것이 어려워졌다”고 설명했다.

회장 구인난 만성화

최근 전경련은 회장을 뽑을 때마다 만성적인 구인난에 허덕이며 위상이 더 추락했다.

외환위기 당시 전경련 회장이었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대우가 공중분해되면서 자진 사퇴했다. 국내외 행사에 대통령과 빈번히 동행하며 친분을 과시하던 김 전 회장이었지만 그룹 해체는 막을 수 없었다. 이를 본 대기업 총수들 사이에선 ‘욕만 먹고 실익은 없다’며 회장 직을 맡지 않으려는 경향이 굳어졌다.

삼성(이병철) 현대(정주영) LG(구자경) SK(최종현) 등 주요 그룹 총수들이 맡던 회장 직의 위상도 점점 낮아졌다. 외환위기 이후 경방(김각중) 동아제약(강신호) 효성(조석래) 등을 거쳐 현재는 재계 서열 8위인 GS그룹의 허창수 회장에게 회장 직이 넘어가 있다.

회장들의 수난사도 이어졌다. 전문경영인이었던 손길승 전 SK그룹 회장은 2003년 전경련 회장으로 취임했다가 계열사 분식회계와 대선 비자금 문제로 구속되면서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조석래 회장은 건강상의 이유로 두 번째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사의를 표했다. 조 회장이 사의를 표하자 회장단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에게 회장 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으나 이 회장이 거절해 6개월 동안 공백 상태가 이어졌다.

회장단 회의의 무게감도 떨어졌다. 회장단 중 이건희 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수년째 회의에 안 나오고 있다.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강덕수 전 STX 회장은 재판을 받고 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뒤 치료를 받고 있고,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직 수행을 이유로 사퇴 의사를 밝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회의가 열려도 ‘그 얼굴이 그 얼굴’인 상황이다. 전경련 측 참석자인 허창수 회장과 이승철 상근부회장 외에는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 이준용 대림산업 명예회장,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 류진 풍산그룹 회장,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 정도만 나오기 때문이다. 50대 그룹 임금총액 동결, 이동통신사업 허가를 위한 단일 컨소시엄 구성 등 굵직한 결정을 내리던 회장단 회의였지만 최근에는 현안 보고만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경제단체 ‘맏형’ 역할 축소

전경련은 대한상의, 한국무역협회보다 출범은 늦었지만 그동안 경제 5단체의 맏형 노릇을 했다. 발언권도 가장 강해 재계 의견을 정할 때 다른 단체들을 주도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경제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지면서 업종 규모 등에 따라 이해관계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아졌고 경제단체들의 의견을 모으는 것도 힘들어졌다. 여기에 대기업에 대한 반감이 커지며 ‘전경련이 나서지 않는 게 돕는 것’이라는 분위기도 생겼다.

최근에는 전경련 내부적으로도 ‘역할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일부 대기업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익단체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국가 및 산업계 전반을 아우르는 공익적 역할을 강화할지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무협과 경총은 각각 수출기업, 노사관계라는 특정 분야에 주력하고 있으며 중소기업중앙회는 중소기업의 목소리를 대변하면서 입지를 다지고 있어 ‘이익단체’ 쪽에 가깝다. 반면 대한상의는 최근 좌우를 아우르는 방향으로 스펙트럼을 넓히면서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

김태윤 한양대 교수(행정학)는 “전경련 내부 조직은 현재의 어정쩡한 상태를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빨리 방향성을 정립해야 그에 맞는 노력과 혁신을 통해 자신의 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전경련도 나름대로는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대기업만의 이해를 대변하는 단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겠다”고 선언한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개혁의 일환으로 추진한 네이버 다음 등 정보기술(IT) 업체 영입이 불발로 끝났으며 회장단 확대도 원하는 이가 없어 유야무야돼 체면만 구겼다.

임채운 서강대 교수(경영학)는 “정부와 경제단체가 파트너십을 발휘하며 산업 정책을 주도하던 시절이 끝났기 때문에 전경련의 역할도 자연스럽게 줄어든 것”이라며 “중소기업과의 상생 협력을 확산시키거나 소상공인과의 상생 협력을 확대하는 등 새로운 방향으로 자리매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 6개월째 절반 비어… “한층 임대 유치땐 1500만원 보너스” ▼

위상추락 대변하는 새 전경련회관

2013년 12월 준공했으나 절반 이상 비어 애물단지가 된 전경련 회관. 전경련 제공
2013년 12월 준공했으나 절반 이상 비어 애물단지가 된 전경련 회관. 전경련 제공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설립 초기 셋방을 전전하다 1979년 11월 16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대로 24에 지상 20층, 지하 3층의 전경련 회관을 준공했다.

당시 전경련 회장이었던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는 특유의 추진력으로 취임 6개월 만에 공사에 착수해 2년 1개월 후에 완공했다. 높이 82.5m로 당시 여의도 최고층 건물이었다.

준공식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도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10·26사태로 세상을 떠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전경련은 박 전 대통령이 준공식을 앞두고 직접 써서 보낸 휘호 ‘創造 協同 繁榮(창조 협동 번영)’을 가로 약 4.2m, 두께 약 2.1m의 화강암에 새겨 기념석을 만들었다. 휘호에서 ‘1979년 11월 16일’로 돼 있던 날짜만 ‘10월 16일’로 고쳤다. 이 기념석은 아직 전경련 회관 앞에 서 있다.

전경련 회관 설립은 이후 여의도 개발 붐을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 ‘재계의 전당’으로 불릴 정도로 위상도 높아졌다.

하지만 20년 넘게 흐르면서 시설이 노후하자 전경련은 회관을 헐고 새 회관을 짓기로 결정하고 2009년 은행에서 4000억 원을 빌려 공사에 착수했다. 전경련 설립 50주년을 맞아 지상 50층, 지하 6층으로 설계했으며 한옥의 처마 선을 모티브로 삼았다.

새 회관은 공사에 들어간 지 3년여 만인 지난해 12월 준공됐으나 부동산 경기가 추락하면서 임대가 이뤄지지 않아 전경련의 골칫덩이가 되고 있다. 현재 LG CNS만 유일하게 입주한 상태로 절반 이상이 비어 있다. 은행에서 빌린 원금 상환은 엄두도 못 내고 이자만 겨우 갚고 있는 수준으로 알려졌다.

전경련은 직원들에게 한 개 층 임대를 알선할 경우 1500만 원을 현금으로 지급하겠다고도 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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