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김이재]영국 지리학자 비숍 여사에 관한 오해와 진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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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재 문화지리학자·경인교대 교수
김이재 문화지리학자·경인교대 교수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하던 19세기 영국의 여성들은 집안의 천사로 살아야 했다. 중상류층 여성이 혼자 외출만 해도 구설에 오르던 시절에 보수적인 기독교 가정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나 세계 오지를 탐험한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빅토리아 시대 여성들의 우상이었다.

카메라가 없어 사진을 보여줄 수 없던 시대에 세계 각지의 풍경과 흥미로운 문화를 생생하게 묘사한 그녀의 여행기는 큰 인기를 끌었다. 왕립지리학회는 치마 입은 탁월한 여성 여행가를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데 인색했다. 그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측량법과 사진술을 배우고 지리학자로서 세계 여행을 계속했다.

환갑이 넘은 그녀가 극동 지역을 꼼꼼히 답사한 후 67세에 출판한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은 그녀 생애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마침내 그녀는 (많은 남성 지리학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여성 지리학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비숍 여사 덕분에 많은 영국 여성이 ‘정신의 코르셋’을 벗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었고, 나를 비롯해 전 세계의 많은 여성이 지리학자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

비숍 여사는 한국의 역사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이미 유명하다.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가 강연에서 비숍 여사를 언급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 특별한 애정을 보였던 비숍 여사의 진심과 책의 내용이 왜곡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비숍 여사의 후배 지리학자로서, 또 영국 전역을 답사하며 그녀의 흔적을 샅샅이 추적하고 영국 여성들의 삶을 소개한 책을 쓴 적이 있는 저자로서, 그녀를 둘러싼 오해의 소지를 없애고 진실을 알리고 싶다.

첫째, 문 후보자가 해명했듯이 비숍 여사는 ‘한국인이 천성적으로 게으르다’는 취지로 책을 쓰지 않았다. 비록 한국에 대한 첫인상은 별로였다고 책의 전반부에 잠깐 언급했지만, 한국을 4차례 방문하고 1년가량 전국 방방곡곡을 답사한 후 한국인의 장점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높게 평가했다. 상류층과 관료들의 부정부패로 국민들의 잠재력이 충분히 계발되지 못한 점은 안타깝지만 ‘한국의 땅에, 바다에, 역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국민들 속에 희망이 있다’고 역설하며, 서방 세계에 매우 낯선 나라였던 한국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설파하였다.

둘째, 그녀는 매우 정확하게 한국의 문제점을 꿰뚫어본 탁월한 지역 전문가였다. 나룻배와 조랑말을 타고 전국을 다니면서 시골 아낙네부터 명성황후 등 최고위층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본 후 풍요로운 자원과 농사에 유리한 자연 환경, 부지런한 농민들로 한국은 발전의 가능성이 매우 높은 나라라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탐욕스러운 지배층의 횡포와 정의의 부재로 백성들이 절망하고 있다고 분석하였는데, 19세기 말 영국의 지리학자가 지적한 조선사회의 구조적 병폐는 21세기 한국이 직면한 문제적 상황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셋째, 그녀는 73세에 에든버러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한국을 그리워하고 한국인을 진정 사랑한 영국 여성이었다. ‘나는 서울이 영국의 어느 곳보다 집처럼 느껴지고, 영국보다는 극동 아시아에서 살고 싶다’며 병상에서도 여행 가방을 꾸릴 정도였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영문 초판본을 선물한 것만 보아도 비숍 여사가 한국을 얼마나 사랑했고 한국의 긍정적인 측면을 외국에 알리는 데 기여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밝히고 싶은 것이 있다.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번역자가 쓴 해제에는 부정확한 이야기가 소설처럼 등장한다. ‘이사벨라 버드는 51세에 10살 연하의 의사 존 비숍과 결혼하였는데 애초에 존 비숍은 동생 헨리에타의 연인이었고… 존은 이사벨라와 결혼한 후에도 죽은 헨리에타를 잊지 못해 괴로워했다’는 내용이다. 그녀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읽고 관련된 학자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수십 차례 영국을 방문하여 그녀와 관련된 공간을 샅샅이 답사했지만 나는 이를 입증할 근거를 찾지 못했다. 진실은 이러하다.

이사벨라 버드는 스코틀랜드 출신 의사 존 비숍으로부터 여러 번 청혼을 받았지만 계속 거절하다 병든 여동생을 헌신적으로 돌보아 준 그의 정성에 마음을 돌려 늦은 나이에 결혼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비숍 부부는 세계 오지의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돕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에 대한 이상을 공유했다. 비록 짧은 결혼생활이었지만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그녀는 세계 오지를 여행하며 남편의 이름을 딴 병원을 세우는 일에 헌신했다.

김이재 문화지리학자·경인교대 교수
#이사벨라 버드 비숍#여성#영국#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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