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영의 따뜻한 동행]책과 사람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19일 03시 00분


코멘트
살다 보면 어떤 하루는 참 특별하다. 지난 토요일이 그랬다. 오후에 강릉 선교장 포럼에 참석한 후 부랴부랴 상경해 밤에는 여석기 선생님의 빈소에 갔다.

“아버지는 구십이 넘으셨어도 여전히 읽고 싶은 책이 많으셨나 봐요. 아마존에 신청하신 책이 하필 돌아가신 날에 도착해서 채 뜯지도 못하고 주인 잃은 책상 위에 그냥 두고 나왔어요.”

평생 영문학자와 연극평론가로 사신 고인이 92세에도 여전히 책을 주문하여 읽으셨다는 따님의 말에 감동했다. 마침 오후에 다녀온 선교장 이야기와 겹쳐서 더 그랬을지 모른다. 내년에 200주년을 맞이하는 선교장의 건축적 정신에 대한 특강과 ‘백범일지, 어떻게 복간할 것인가’에 대한 포럼에서 강릉의 한 교수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선교장은 1만 권 가까운 문집을 소장하여 조선시대에는 열 손가락 안에 들었어요. 그런데 제가 감동한 것은 책의 수효보다 책을 대하는 자세였습니다. 귀중한 서책을 모셔만 두지 않고 열람을 신청하면 선교장 주인이 직접 장갑 낀 손으로 보자기를 덮은 상 위에 책을 올려 가져오는데 그 모습을 보고 누가 감히 책을 함부로 대할 수 있겠어요.”

그런 선교장의 후손인 출판사 열화당(선교장 사랑채의 이름)의 이기웅 대표는 포럼에서 그동안 백범일지가 80종이 넘게 출간되었지만 백범 김구 선생의 정신을 온전하게 드러내는 정본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백범 선생은 타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위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독립된 나라에서 편안하게 사는 후손들이 그 원본을 제대로 복간하는 일조차 못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냐는 것. 그래서 상업성과 관계없이 어려운 작업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날 하루, 나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책을 사랑하는 세 분을 만났다. 가치 있는 책을 만들기 위하여 헌신하는 분, 책을 신주 모시듯 받드는 분, 그리고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책을 주문하여 읽는 분.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데, 그렇다면 제대로 된 책을 만드는 일이야말로 제대로 된 사람을 만드는 지름길이 아닌가.

정현종 시인은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한 권의 책도 그런 것 같다. 책에는 인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담겨 있으니 말이다. 좋은 책과 만난다는 것 또한 어마어마한 일이다.

윤세영 수필가
#책#선교장#이기웅#백범일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