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文 총리 후보에 거취 압박하는 청와대 무책임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19일 03시 00분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어제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인사청문 요구서 제출과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이 21일 귀국해 여러 상황을 충분히 검토한 뒤 재가(裁可)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문 후보자의 과거 말과 글에 대한 논란이 커지면서 대통령이 총리 임명동의안을 내기가 부담스러워졌다는 의미다. 설령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친다 해도 임명동의안의 국회 인준 표결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대통령 귀국 전에 문 후보자의 자진사퇴를 압박하는 수순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가 총리 후보자를 지명해놓고 논란이 제기된다고 해서 인사청문 요구서 제출을 차일피일 미루는 것은 전례에도 없는 무책임한 일이다. 언론인 출신을 총리 후보자로 추천하면서 칼럼을 비롯한 공식 활동 이력 정도는 당연히 검증했을 것이다. 그들 나름의 기준에서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면 법이 정한 인사청문회를 통해 진의를 설명하고 총리로서 직무 수행에도 문제가 없음을 입증하게 해주는 것이 인사청문회 제도의 취지에 맞다.

청와대가 문 후보자의 교회 강연 내용을 미처 검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직전 안대희 후보자의 예기치 못한 낙마 뒤에 급하게 후보자를 찾느라고 재산, 병역 같은 전통적인 청문회 낙마 항목과 신종 항목인 전관예우 이외의 돌발변수는 미처 체크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크다. 청와대 검증 라인이 놓쳤거나, 알고는 있었지만 새누리당 의원들도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문제가 될 것이라는 판단을 하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후보자 지명을 철회해야 옳다. 청와대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장관 후보자 7명의 인사청문 요구서까지 덩달아 제출하지 않는 건 국정을 파행으로 모는 일과 다름없다.

인사청문 요구서 제출도, 지명 철회도 하지 않으면서 문 후보자에게 자진사퇴를 압박하는 것은 인사권자인 박 대통령의 부담을 덜기 위한 ‘방책’이라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문 후보자로서는 종교행사에서의 발언을 거두절미하고, 과거의 모든 칼럼 내용까지 옥석 구분 없이 매도당하는 것이 억울할 수도 있다. 청와대가 가만히 있던 사람을 총리 후보자로 올려놓고 인민재판식의 비난을 받게 하고는, 소명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알아서 물러나도록 무언의 압력을 가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박 대통령이 지명을 철회하는 것이 어려울 경우 2006년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후보자가 스스로 지명철회 요청을 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인 전례를 참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 문 후보자를 둘러싼 사달은 애초에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 사람을 총리감으로 추천했거나, 제대로 검증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다. 그렇다면 문 후보자의 자진사퇴를 요구할 게 아니라 인사책임자들이 먼저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마땅하다. 서청원 새누리당 의원은 어제 “차제에 외부 인사위원회를 만드는 시스템을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시스템은 필요하면 고치면 될 일이지만 인사권한을 행사하는 사람이 그대로이면 인사 참극의 반복은 막기 어렵다.
#문창극#국무총리 후보자#박근혜 대통령#자진사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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