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양섭 전문기자의 바둑人]<14> 고수? 난 교수!…하루 20시간 공부 ‘가르치는 프로’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12일 16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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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은 인생과 많이 닮았습니다. 인생은 한 면은 생존을 위한 경쟁입니다. 홉스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고 말했지요. 사실 바둑도 경쟁입니다."

11일 오후 1시 경기 용인시 처인구 명지로 명지대 자연대캠퍼스 제1공학관 5층 강의실. 명지대 바둑학과 정수현 교수(58)가 3학년생의 '바둑학 개론'(1학기) 마지막 강의를 하고 있었다. 주제는 '바둑과 인생'. 호리호리한 몸매의 정 교수는 논리 정연한 TV바둑 해설로 유명했던 프로기사. 그런 그의 강의는 17년 교수경력까지 보태져 물 흐르듯 유려하게 이어졌다.

"인생이나 바둑 모두 끊임없는 선택의 과정이며 인생도 바둑처럼 포석중반 끝내기 단계가 있다. 그런 만큼 인생도 훌륭하게 꾸려나가려면 모든 단계에서 주어진 과업(task)을 잘 수행해야 한다." 마지막 강의인 만큼 강의 초점은 인생을 바둑의 시각에서 바라보라는 것이었다. '부분보다 전체를 보라' '제3자의 시각을 보라(객관적 시각)' '정석은 외운 뒤 잊어라(창의적 사고)'같은. 강의 중 그는 한국이 일본바둑을 넘어 최고가 될 수 있었던 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틀을 깨고 고정관념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그러면서 학생들에게도 같은 것을 주문했다. "자랑 같지만…"이라며 삼성그룹 사장단 앞에서 한 강연을 사례로 들던 그의 모습에선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바둑학'을 개척한 노장기사의 자부심이 풍겨 나왔다. 강의가 끝난 후 바둑학과 사무실에서 그와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기네스북감인 '세계최초 바둑학과의 교수 1호'라는 타이틀 외에 바둑명문 충암고가 배출한 프로기사 1호, 바둑입문 3년 9개월 만에 프로입단 등 불세출의 기록을 보유한 기사다.

내 첫 질문은 '교수가 되기 전 이미 '반상(盤上)의 교수'라고 불렸는데 그런 별명이 교수가 되는 데 도움이 됐는지"였다.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반상의 교수라는 별명은 SBS 신병식 위원(현 경성대 교수)이 지어줬다. 내가 책도 많이 쓴데다 내 해설이 비교적 논리 정연한 것으로 비친 덕에 그리 불린 듯싶다. 명지대가 바둑학과 교수모집 공고를 낸 건 1997년이었다. 그런데 내가 지원하지 않자 명지대 측에서 사람을 보냈다. 반상의 교수가 왜 지원을 하지 않았느냐며 지원하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지원하지 않은 건 당시 바둑 성적도 괜찮았고 교수가 되면 토너먼트 프로 생활을 하지 못할까 봐서였다. 교수에 지원할 때도 처음 1년만 해보고 계속할지를 결정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6개월쯤 지나고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내게 바둑을 배우러 온 학생 20명의 미래가 걸린 일이라 이젠 딴마음을 먹을 수가 없게 되어서였다."

―모든 게 처음이라 커리큘럼 짜기부터 힘들었을 텐데….

"그렇다. 상당부분이 내가 처음 시작한 것이었다. 바둑학과 교수는 물론이고 2001년 연 '바둑학 국제학술대회'나 바둑학회 역시 내가 처음으로 조직한 것이다. 당시 한국기원 쪽에도 교육 커리큘럼이 있었지만 주로 바둑역사(중국과 일본)에 포석(포석 중반 종반 현대포석 등) 같은 기술 위주였다. 나는 '이걸로는 크게 부족하다' 싶어 바둑교육과 심리학 등의 과목을 바둑학과에 들였다. '바둑철학' 과목은 개설 후 서울대 정치학 박사인 문용직 프로(현 중앙일보 객원기자)에게 강의를 부탁했다. 그런데 그가 고사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내가 맡게 됐다. 그러다보니 연구하며 가르칠 수밖에 없었는데 처음엔 무척 힘들더니만 종강할 무렵이 되니 조금씩 자신이 붙었다. 이 과목은 지금 바둑예술론과 바둑문화론으로 대체됐다."

―첫해 입학한 제자 20명은 많이 기억날 것 같은데….

"왜 아니겠는가. 그들이 졸업한 2000년은 여러 가지 일들로 해서 잊을 수가 없다. 졸업생 중엔 NHN에서 일하는 등 바둑계에 종사하는 경우도 많지만 모델도 있다. 당시 나는 바둑계에서 일할 인재를 키운다는 생각에 의욕적이었다. 그래서 바둑계 발전에 도움이 될 일이라면 뭐든 했다. 2001년 국제바둑학술대회는 해외에서 25명을 초청해 한국바둑계를 세계에 알린 굵직한 행사였다. 첫 국제행사였지만 당시 송자 총장의 적극지원으로 성공적이었다. 당시 한국은 세계 바둑계에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네덜란드 참가자가 '한국도 바둑을 두느냐'고 묻을 정도였다. 2003년 러시아에서 열린 유로바둑콩그레스에는 바둑학과 학생들과 함께 참가했다. 이후엔 외국인이 명지대 바둑학과에 유학 오는 일도 많아졌다."

―외국 유학생들은 얼마나 되나.

"지금까지 30여 명이 수학했다. 초창기에는 적극적으로 유치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정 교수는 2007년도에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 제목은 '대학생의 개념도(concept map) 활용 바둑학습 및 바둑에 대한 사전지식이 지식습득과 문제해결에 미치는 효과'다. 개념도는 교육학에서 문제해결 과정에서 쓰이는 용어. 논문은 '개념도를 활용한 수업은 전통적인 문제풀이 수업보다도 지식습득에 긍정적이다.' '학습자의 사전지식이 낮은 경우엔 전통적인 수업보다 개념도 활용 수업이 효과적'이라는 내용인데 대학생 206명을 대상으로 실험해 그 결과를 통계적으로 검증한 내용이다.

전북 남원 출신의 그는 충암고를 거쳐 한양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그에게 공부를 하게 된 계기를 물었다. "프로가 돼도 공부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중학교 때 '영어실력기초'란 참고서를 재미있게 보았다. 나름 공부에 취미가 있었던 모양"이라고 그는 답했다. 그의 말은 바둑 공부로 이어졌다.

"바둑은 중학교 때 친구의 형을 통해 알게 됐는데 그 뒤에 푹 빠졌다. 잘 둔다는 칭찬을 곧잘 들었고 덕분에 충암고에 스카우트 됐다. 한국기원 원생이 된 건 1972년인데 당시 원생제도가 무너져 나 혼자 공부하게 됐다. 그때 나는 새벽 4시면 일어나 밤 12시까지 하루 20시간을 바둑공부에 매달렸다. 일본 것을 포함해 바둑책 200여 권을 보았다. 내 바둑이 이론적이 된 데는 이처럼 실전보다 책을 통해 배운 덕분이라 생각한다. 나는 프로를 내 나름 방식으로 분류-사카다는 '수비', 누구는 '공격' 등-하는데 이건 학문적인 접근이라고나 해야 할지…(웃음). 프로 기사는 집중력이 뛰어나다. 바둑학과의 남치형 교수가 좋은 예다. 그는 고2 때에야 비로소 입시공부를 시작했는데도 서울대 영문학과에 떡 하니 합격했다. 3년 9개월 만에 내가 프로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집중력 덕분이라 생각한다."

그에게 교수가 된 뒤에도 바둑대회에 참가하는 이유를 물었다. 그는 올해도 바둑대회 예선에 간혹 나왔다.

"바둑을 가르치는 교수지만 여전히 프로 기사다. 또 바둑대회에서 성적을 내면 연구실적에 가산점도 주는 제도가 있어 초창기에는 열심히 뒀다. 맥심배 4강에도 나가고 성적도 괜찮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가르치는 일에 바빠 그렇게 열심히 둘 수는 없었다."
그는 윤기현 양상국 등과 함께 '바둑해설 1세대'에 속한다. KBS에서 '일요바둑'을 맡았고 이후엔 노영하 사범과 함께 해설을 진행했다. 윤 사범이 구수한 입담으로 팬을 얻었다면 그는 정연한 논리로 관심을 끌었다. 그는 바둑TV 등에서도 해설했다.

―바둑 책을 30권도 넘게 내셨는데….

"1987년 미국 바둑행사에 갔다가 재미교포로부터 하소연을 들었다. '미국엔 한국바둑책이 없으니 영어로 된 문제집이라도 하나 내달라'는 주문이었다. 그게 애국심을 발동시켰고 처녀작 '정수 포석법'을 펴냈다. 이후 바둑카세트 20편과 비디오 10편을 찍었다. 한국기원 바둑교본도 냈다. 이런 바둑 기술서 외에 에세이도 몇 권 펴냈다. '반상의 파노라마' '바둑과 인생' '바둑CEO' 등이다. 교수가 된 뒤엔 대학교재 '바둑학 개론'을 썼다. 인세를 책으로 받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가장 기억나는 책을 꼽아달라는 주문에 그는 '바둑CEO'를 들었다. 2009년 발간된 이 책은 바둑에 경영을 접목시켜 관심을 모았던 책이다. 덕분에 그는 한 언론사가 운영한 'HiCEO'란 온오프라인 강의에서 58회나 강의를 했고 이게 알려지며 각종 강연의 인기강사로 러브콜을 받았다. 2012년 삼성사장단 대상의 '바둑에서 배우는 경영의 지혜' 강연도 그중 하나다. 그는 "바둑돌을 놓는 과정은 기업의 의사결정과정과 비슷하다." "조훈현 9단 같은 초고수는 천적이 출현할 때 스타일을 바꾼다. 그러니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려면 기존 스타일을 버려야 한다" 등의 적절한 비유로 공감을 얻었다.

―프로기사 회장을 맡기도 했는데….

"1992년에 회장이 됐다. 현재현 회장 때였는데 한국기원 바둑규정을 고치는 등 제법 일을 많이 했다. 한국기원의 왕십리 이전 문제나 바둑TV 출범 문제 등에도 관여했다. 승단규정도 일부 손을 보았다. 너무 일이 많았던 탓에 이준학 사범, 전영선 사범, 김학수 사범이 쓰러지기도 했다. 주변에서는 한 번 더 맡으라는 요구도 있었지만 개인생활이 없고 너무 힘들어 물러났다. 학교에 오지 않았다면 한국기원 사무총장 등 행정을 맡아보려는 생각도 있었다."

―이제 정년에 6, 7년 정도 남은 것 같은데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바둑계가 예전 같지 않다. 젊은 층이 없다. 그런 바둑계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생각 중이다. 명지대 바둑학과는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다른 학교에서도 생겨 열 개쯤은 돼야 하는데 아직은 이것 하나뿐이다. 중국이나 서양에 교육상품으로 바둑을 수출하는 방안도 마련하
고 싶다."

그는 "바둑 인구를 확장하려면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고 그러려면 한국기원에도 박사급 인력이 필요한데 아직은 그런 변화에 대해 대처가 폐쇄적이라는 느낌이 든다"고 꼬집었다. 한국기원의 행정에 대한 불만으로 들릴 만한 이야기다. 그는 프로기사 대의원으로 13년간 활동했고 지금도 김효정 프로기사 회장 체제에서 대의원을 맡고 있다.

―한국 바둑이 중국에 밀리고 있는데….

"중국은 바둑 인구가 많고 사회적으로도 바둑을 권장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바둑이 쉽게 쓰러지진 않을 것으로 본다. 한국이 왜 지는 지를 연구하고 학문적으로 도움을 받을 일이 있다면 받아야 한다. 중국이 우릴 이기는 것도 길게 보면 반길 일이다. 중국과 손잡고 바둑콘텐츠를 개발해 전 세계에 퍼뜨리면 함께 윈윈할 수 있다. 아시아경기에 바둑을 정규종목으로 포함시키는 데 중국을 활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에게 가장 기억나는 대국을 묻자 그는 1986년 제1기 신왕전에서 강훈 프로에게 2-1로 승리해 우승한 것을 꼽았다. "당시 강훈 사범에게 자주 지던 편이었다. 강 사범은 끈끈한 바둑을 두었는데 그날만큼은 내 바둑을 둘 수 있어 이겼다"고 회고했다. 그는 자신의 기풍을 '나비'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그건 내 말이 아니고 서봉수 9단의 표현"이라면서 "가볍게 그리고 이론적으로 두어서 그렇게 부른 것 같다"고 덧붙였다.

끝으로 자신에게 바둑은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는 "생활 깊숙이 파고든 나의 천직"이라 답했다. 이어 그는 "이젠 물러날 때에 대비해 정리하는 단계"라면서 "그동안 일이 많아 미뤄두었던 저술활동을 다시 시작할 생각"이라고 계획을 밝혔다.

윤양섭 전문기자laila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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