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文盲의 늪보다 무서운 數盲의 늪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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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584년 전인 1430년 6월의 어느 날, 세종이 신하들과 국사를 논의하다가 갑자기 신하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한양의 위도가 얼마인고?” 세종 앞에 늘어선 많은 신하들이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돼 대답을 하지 못했다. 세종이 다시 물었다. “한양의 위도가 얼마인고?” 신하들은 머리를 숙인 채 서로를 힐끔거리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침묵이 길어지자 세종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한 신하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한양의 위도는 38도 강(强)이옵니다”라고 대답했다. 세종은 놀랐다. 나중에 세종은 그에게 조선의 천문역법을 책임지라며 발탁인사를 단행했다. 대답을 한 그 신하가 바로 이순지(李純之)다. 그는 당시 승문원에서 외교 문서 관련 업무를 맡았던, 천문과는 무관한 직급의 관료였다.

세종은 즉위 초부터 조선의 독자적인 천문역법을 세우고자 했다. 삼국시대에는 주로 중국의 역법을 빌려 썼고 고려 때는 그것을 개성 기준으로 약간 수정해서 사용했다. 조선시대에 한양으로 천도한 후에는 그것을 약간 더 수정해서 사용했지만 근본적으로 조선을 기준으로 한 천체 운동은 계산하지 못했다. 세종은 조선에 맞는 역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선의 천문역법을 정비하라는 세종의 명에 따라 이순지를 중심으로 역법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약 10년의 기간이 지난 후 조선의 독자적인 역법인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과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 편찬됐다. 칠정(七政)이란 해, 달,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을 말한다. 이로써 그동안 중국 역법에 의존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비로소 조선 고유의 천체 운행을 계산할 수 있게 됐다.

이순지가 세종에게 발탁된 것은 우연이나 운이 아니다. 임금이 우리만의 역법을 세우려는 뜻을 갖고 있음을 알고 가장 기본이 되는 한양의 위도를 미리 고민한 결과다. 이미 계산을 끝내고 준비한 이순지에게 세종의 느닷없는 질문은 오히려 그를 돋보이게 하는 기회로 작용했다.

개인이나 기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레드오션이 아닌 블루오션을 찾아야 한다. 겉으로 말만 번지르르할 뿐 실제 내공이 부족한 사람이 많은 오늘날, 숫자와 통계, 그리고 이를 토대로 한 분석 능력이야말로 자기계발의 블루오션이다. 많은 사람이 통계를 어려워한다. 숫자만 나오면 피하고 싶어 하고 재미없어 한다. 존 파울로스 미 템플대 교수는 현대에 문맹이란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숫자에 두려움을 갖고 편안하게 다루지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수맹(數盲·innumeracy)’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어려워하며 자신 없어 하는 분야야말로 경쟁이 적고 광활하게 열린 블루오션이다. 사실 숫자와 통계를 기반으로 하는 분석 능력은 이 시대 직장인들이 갖춰야 할 필수 역량이기도 하다. 데이터가 넘쳐날수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해서 필요한 정보를 추출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효율적인 의사결정은 계량적 정보를 얼마나 능숙하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

분석은 이미 오래전부터 여러 영역에서 효과적으로 활용돼 왔다. 일반적으로 분석은 단계적으로 진행된다. 영역과 무관하게 적용할 수 있는 분석 방법은 문제 제기→관련 연구 조사→모형화→자료 수집→자료 분석→결과 제시 등 여섯 단계로 구성된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서울의 어느 한 대형 설렁탕집. 주인은 손님들이 먹다가 남기는 김치 때문에 늘 고민이었다. 한꺼번에 많은 양을 주면 남기기 일쑤고 적게 주면 다시 달라는 요청이 여러 번 들어와 안 그래도 일손이 달리는 식사시간에 효율적인 응대가 어려웠다. 그때 그 설렁탕집에 아르바이트생으로 한 여학생이 들어왔다. 그 학생은 들어온 지 한 달 만에 사장의 고민을 해결했다. 감격한 사장은 그 학생을 정직원으로 채용했다. 그의 문제 해결 과정은 다음과 같다.

―문제 제기: 어떻게 하면 손님들에게 한 번에 적정량의 김치를 제공해 남기는 양을 최소화할 수 있을까?

―관련 연구 조사: 사람들이 한 끼 식사 때 먹는 김치의 양과 관련된 자료는 많지 않다. 식품 영양이나 요리 분야에서 부분적으로 자료를 찾을 수는 있지만 이 문제에 직접 활용하기는 어렵다. 특히 설렁탕이라는 특정 유형의 음식과 함께 먹는 김치 양에 대해서는 참고할 자료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기존 자료에 의존하기보다는 새로 자료를 수집해야 한다.

―모형화: 아르바이트생은 우선 한 테이블의 손님들이 먹는 김치 양과 관련된 변수들을 열거해 봤다. 손님 수, 손님 구성(남/여, 노인/성인/아동 등), 김치 맛, 김치 염도, 계절, 배추 가격 등을 변수로 꼽을 수 있었다. 이 중 김치 맛과 염도는 식당 이미지를 위해 함부로 바꿀 수 없고 계절이나 배추 가격은 매장 안 김치 소비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을 것으로 판단해 제외했다.

―자료 수집: 설렁탕을 먹을 때 곁들여 먹는 김치의 양에 대해 다른 사람이 수집하고 정리한 자료를 찾기는 어려우므로 자료를 직접 수집해야 한다. 이때 설문조사나 실험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해 아르바이트생은 관찰을 통해 자료를 수집하기로 했다. 처음 제공되는 김치 양은 테이블당 손님 수에 따라 미리 정해진 양을 제공하고 남겨지거나 추가된 양을 표에 기록해서 자료를 모았다. 아르바이트생은 2주 동안 총 300테이블의 자료를 수집했다.

―자료 분석: 손님 수와 손님 구성이 총 김치 소비량에 미치는 영향을 회귀분석(변수가 결과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통계적 기법)을 통해 분석했다. 여기서 변수는 손님 수와 손님 구성, 그로 인한 결과는 김치 소비량이 된다. 이를 통해 변수가 변할 때 결과가 얼마나 달라지는지 파악할 수 있다.

―결과 제시: 아르바이트생은 사장에게 분석 결과를 표와 그래프로 만들어 상세하게 설명했고 사장은 크게 만족했다. 그 후 테이블에 손님이 앉으면 분석 결과를 토대로 손님 수와 손님 구성에 맞게 미리 정해진 적정 양의 김치를 제공했다. 그 결과 남는 양을 최소화했고 종업원들의 일처리(추가 김치 제공 및 남은 김치 폐기 등) 부담도 낮출 수 있었다.

이처럼 숫자와 통계를 활용한 분석은 설득력 있는 논리와 구체적인 해결책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업무뿐 아니라 다양한 상황에 응용될 수 있으며 보다 효과적인 일처리를 가능하게 한다.

김진호 서울과학종합대학원 빅데이터 MBA 주임교수 jkkim6@assist.ac.kr
#문맹#수맹#한양 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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