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부형권]누가 나의 알맞은 이름을 불러다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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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형권 정치부 차장
부형권 정치부 차장
전해 들은 어느 폐인(廢人) 이야기. 전망 좋은 대학을 나왔고 좋은 직장에 입사했는데 어느 순간 삶의 좌표를 잃어버렸다. 가족도, 친척도, 친구도 모두 그를 피했다. 자활(自活) 의지가 없으니 도울 의욕도 생겨나지 않았다. 그런데 안타까운 삶과 달리 그의 이름 한 자 한 자는 화려했다고 한다. 그래서 듣는 말이 “팔자에 넘친 이름을 감당하지 못한 게야”.

그의 추락이 온전히 이름 때문일 리 없다. 유명한 역술가들의 결론은 한결같다. “인생을 가장 크게 결정하는 요소는 성명(姓名)도 사주(四柱)도 관상(觀相)도 아닌, 심상(心相·마음가짐)이다.” 맞다. 그리고 안다. 그래도 체험적으로 이름은 중요하다. 개인뿐만 아니라 정책이나 정치에서도 그렇다. 딱 맞는 이름, 적확한 용어가 아니면 본체가, 몸통이 흔들린다.

이 정부의 두 번째 국가안보실장에도 국방부 장관 출신이 임명되자 든 첫 생각은 ‘안보실 이름부터 바꿔야겠다’. 국가안보 하면 대북 태세, 그러면 강골 군인, 그렇다면 호상(虎相) 김관진. 이런 말 잇기 게임처럼 인선이 이뤄진 걸까. 그 기대에 부응하듯 김관진 신임 실장의 첫 행보는 7일 서부전선 최전방을 찾아 “도발하면 응징하라”. 국방장관과 안보실장의 역할과 책임(Role & Responsibility)이 어떻게 다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초강대국의 국가안보도 정교한 전략과 치밀한 대외정책 없이는 확보되기 어려운 세상이다. 한반도의 가장 큰 위협인 북한 핵과 미사일은 이미 국제문제다. 중견 외교관들은 “안보전략실이나 안보정책실이라면 적임자로 추천할 (외교관) 선배가 몇 있었다”고 말한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외교부도 경제부처”라고 말해왔다. 정부조직법상 부처 기능으로 ‘경제외교 및 국제경제협력외교’가 새로 명시되긴 했다. 그러나 기존 외교통상부가 외교부로 이름 바뀐 이유는 ‘통상’을 다른 부처에 떼 줘야 했기 때문이다. 일선 외교관들은 하소연하듯 묻는다. “무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한국에서 통상이 아니면서 경제외교인 업무가 무엇인가요?” ‘이름 따로 몸 따로’인 셈이다.

정책의 이름도 잘 지어야 한다. 안 그러면 배가 산으로 간다. 이명박 정부 때의 ‘영리(營利) 병원’이 대표적이다. 병원도 일반 회사처럼 투자와 배당이 가능하도록 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쟁력도 높이자는 의료 규제개혁안이었지만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신성한 의료를 돈벌이(영리)에만 활용하려는 나쁜 병원’처럼 인식되도록 공격받았다. ‘투자개방형 의료법인’으로 개명(改名)했지만 정책 추진의 타이밍은 놓쳐버렸다.

노동경제학자 남성일 서강대 교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핵심도 ‘용어(이름)부터 정확히 쓰자’였다. 예를 들면 “‘정규직이 아니면 모두 비정규직’이라고 규정해 버리면 정치세력화하는 데는 유용할지 모른다. 그러나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직에 대한 맞춤형 해법을 찾거나 정규직의 과보호 문제를 이슈화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정책 과제 해결의 출발점도 ‘이름 정확히 잘 짓기’란 의미였다.

박근혜 정부의 국가개조에 앞장설 정책결정자들에게 기자 책상 앞에 늘 붙어 있는, 유명한 시 한 편을 권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우리들은 모두/무엇이 되고 싶다.’(김춘수의 ‘꽃’)

더 나은 대한민국을 위해, 아이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물려주기 위해 무엇이 되고 싶은 우리에게 ‘알맞은 이름’을 지어주는 것. 국가개조의 가장 중요한 첫걸음인지 모른다.

부형권 정치부 차장 bookum90@donga.com
#이름#안보실#국가안보#윤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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