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68>되새 떼를 생각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9일 03시 00분


코멘트
되새 떼를 생각한다
―류시화(1958∼ )

잘못 살고 있다고 느낄 때
바람을 신으로 모신 유목민들을 생각한다
별들이 길을 잃을까 봐 피라미드를 세운 이들을 생각한다
수백 년 걸려
불과 얼음을 거쳐 온 치료의 돌을 생각한다
터질 듯한 부레로 거대한 고독과 싸우는 심해어를 생각한다
여자 바람과 남자 바람 돌아다니는 북극의 흰 가슴과
히말라야골짜기돌에차이는나귀의발굽소리를생각한다
생이 계속되는 동안은 눈을 맞을 어린 꽃나무를 생각한다
잘못 살고 있다고 느낄 때
오두막이 불타니 달이 보인다고 쓴 시인을 생각한다
내 안에서 퍼붓는 비를 맞으며 자라는 청보리를 생각한다
사랑하지 않고 상처받지 않는 사람보다
사랑하고 상처받는 사람을 생각한다
불이 태우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자신의 심장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깃 가장자리가 닳은 되새 떼의 날갯짓을 생각한다
뭉툭한 두 손 외에는 아무 도구 없이
그해의 첫 연어를 잡으러 가는 곰을 생각한다
새의 폐 속에 들어갔던 공기가 내 폐에 들어온다는 것을 생각한다
잘못 살고 있다고 느낄 때
겨울바람 속에 반성문 쓰고 있는 콩꼬투리를 생각한다
가슴에 줄무늬 긋고서 기다림의 자세 고쳐 앉는 말똥가리를 생각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면서
둥근 테두리가 마모되는 동전을 생각한다
해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질문을 던지기 위해
이곳에 왔음을 생각한다

북극은 눈이 멀 듯 하얗게 얼음과 눈으로 덮인 땅, 하늘 끝까지 혹독하게 차가운 바람이 분다. 그 무기질의 세계를 ‘여자 바람과 남자 바람 돌아다니는 북극의 흰 가슴’이란다. 인간을 비롯한 뭇 생명체들에게 살벌하게 위협적인 그 동토(凍土)의 바람에도 사실 암컷과 수컷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기에 무한 바람을 낳겠지. 류시화 시를 읽다 보면, 자연은 그 자체가 시인 것 같다. ‘깃 가장자리가 닳은 되새 떼의 날갯짓’, ‘뭉툭한 두 손 외에는 아무 도구 없이/그해의 첫 연어를 잡으러 가는 곰’, ‘겨울바람 속에 반성문 쓰고 있는 콩꼬투리’! 시인의 이 날렵한, 상상력이라는 낚싯대!

‘잘못 살고 있다고 느낄 때’는 엄청 고독할 테다. 거꾸로 엄청 고독하면 제가 ‘잘못 살고 있다고 느낄’ 테다. 큰 실패를 겪을 때, 제 인생이 어디부터 꼬였는지 모르겠어서 헤어날 바를 모를 때, 마음의 독을 풀어주는 시다. 몸에 좋으면서 맛도 좋은 즙액 같은 시. 이 시가 실린 류시화 시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은 그런 시편들이 만발해 있다.

황인숙 시인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