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이 만난 사람/방형남]한승주 전 외무부 장관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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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주 전 장관은 인터뷰 내내 잔잔한 음성으로 격변하는 국제정세를 강의하듯 풀어냈다. 그는 복잡한 현안들을 명쾌하게 진단하는 비결을 묻는 질문에 “책 쓰는 것을 제외하면 특별히 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공부할 시간이 많다”며 웃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한승주 전 장관은 인터뷰 내내 잔잔한 음성으로 격변하는 국제정세를 강의하듯 풀어냈다. 그는 복잡한 현안들을 명쾌하게 진단하는 비결을 묻는 질문에 “책 쓰는 것을 제외하면 특별히 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공부할 시간이 많다”며 웃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5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는 최근 강대국들이 벌이고 있는 갈등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회동이었다. 1997년 러시아가 정식 회원국이 되면서 G8로 확대됐던 회담이 17년 만에 G7로 축소됐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7개국 정상들은 크림 반도를 합병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압박하기 위해 ‘그들만의 리그’로 돌아갔다. 미국과 중국이 격돌하는 아시아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신냉전의 도래’를 우려하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소용돌이치는 현재 국제정세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한국은 어떤 ‘생존전략’을 준비해야 할까. 저명한 국제정치학자로 외무부 장관과 주미대사를 지내 외교현장 경험을 겸비한 한승주 고려대 명예교수를 만나 진단과 처방을 들었다.
공동현안 솔직한 대화-설득을

“강대국 간 세력 균형이 변화하는 것은 사실이다. 중국이 부상하는 반면 미국은 상대적으로 발걸음이 느려지고 있다. 러시아는 아시아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강대국 역할을 하겠다고 나선다. 많은 전문가들이 기존 강대국과 신흥 강대국의 갈등이나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꼭 그렇게 볼 일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美蘇) 대립과 현재의 강대국 갈등은 양상이 다르다. 당시는 미국과 소련 양대 진영으로 갈렸을 뿐 아니라 기존 강대국과 자라나는 세력 사이의 갈등이 매우 컸다. 지금은 중간세력이 많아져 양극화와는 거리가 멀다. 힘의 균형, 특히 군사력은 미국이 중국보다 압도적으로 강하고 상당 기간 이런 격차가 유지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념적인 면에서는 강대국들이 예외 없이 시장경제의 원활한 작동을 필요로 한다. 이는 강대국 간의 상호 의존성을 높였다. 미중은 물론이고 중일도 상호 의존성이 크다.”

―헨리 키신저 박사를 포함해 “아시아 상황이 20세기 초 유럽과 비슷하다”며 군사적 충돌 가능성을 제기하는 전문가들이 있다.

“그런 얘기들이 유럽에서 많이 나왔다. 100년 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에 2014년과 1914년의 유사성과 상이성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러나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를 포함해 많은 전문가는 그때와 지금은 다른 점이 많다고 판단한다. 강대국이 무력충돌하면 상호 간 피해가 막심하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재연 가능성은 적다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결론이다.”

―4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에 맞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5월 상하이에서 열린 아시아 교류 및 신뢰구축회의(CICA)를 계기로 푸틴과 손을 잡았다. 중-러가 미일동맹과 맞서는 대결 구도도 우려된다.

“중국 입장에서는 러시아와 손잡을 이유가 충분하다. 경제적으로는 러시아의 에너지 수출이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양국이 우호적이게 되면 훨씬 좋은 조건으로 에너지를 수입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미국이 영토 문제와 관련해 일본을 두둔하기 때문에 중국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과시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중-러 관계는 과거에도 그랬듯이 서로 믿고 좋아하는 사이는 아니다. 영국과 미국, 미국과 일본 같은 관계가 만들어지기는 어렵다. 중-러 접근은 ‘편리를 위한 결혼’ ‘편리를 위한 동맹’이라고 볼 수 있다.”

―시진핑의 ‘신형대국 관계’와 오바마의 ‘재균형 정책’이 충돌할 가능성은 없을까.

“중국은 경제력과 나름 확대된 군사력을 믿고 근육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조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일본명 센카쿠 열도) 문제와 남중국해 영토 분쟁에 대한 강력 대응에서 그런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오바마는 ‘중국을 적대시하지 않는다’고 되풀이해 강조한다. 그러한 발언에 상응하는 실제적 행동이 따르리라고 본다. 중국이 원하는 것은 경제력에 상응하는 국제적 위상, 과거에 약했을 때 잃었던 위신을 회복하는 것이다. 미국이 어느 정도 중국의 요구에 대해 양해하게 된다면 미중 관계는 호전될 수 있다고 본다.”

―문제는 한국의 역할이다. 한미, 한중 관계가 역대 어느 때보다 좋은데도 격변하는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역할을 못 하는 것 같다.

“지금 한반도 주변 상황 자체가 어렵다. 북핵 문제는 미국뿐 아니라 일본과도 긴밀히 협조해야 하는 사안이다. 특히 중국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북핵 해결을 위해서는 미중 관계가 좋아야 북한에 설득을 하든, 압력을 가하든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 이런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 나가려면 한미동맹의 질적 진화뿐 아니라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과 갈등 해소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獨교훈, 통일은 조용히 추진해야

―그렇다면 박근혜 정부의 외교는 어떻게 평가하나.

“정책 자체로 보면 지금까지 비교적 무난한 정책을 구사했다고 보고 있다. 다만 국내에서 소통 부족이 거론되듯이 대외관계에서도 소통이 잘 안되고 있어 걱정이다. 개인 생각이지만 대외 소통 측면에서 박근혜 정부는 다른 정부보다 부족해 보인다. 미국 중국 일본과는 공동의 현안을 놓고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미흡하다. 미국에서는 급격하게 중국에 다가가는 한국 정부의 행동에 의구심을 표시하기도 한다. 일본에도 남북 관계 또는 한중 관계에 대해 우리 입장을 충분히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부 내에서도 정책적 전략적 논의가 활발해졌으면 한다. 전현직 관리들과 민간인 전문가가 현 정부의 의도, 전략, 철학을 잘 알면 외국인들과 논의할 때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정부 정책 실현에 힘이 될 수 있다.”

한 전 장관은 실제로 외국 전문가들을 만났을 때 “한국의 소통 노력이 부족해 아쉽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전했다. 현 정부의 체제, 인적 구성, 성향이 국내외 자유로운 소통을 막는 요인인 것 같다는 분석도 곁들였다.

―박근혜 정부는 독일에서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한 드레스덴 선언을 발표했다.

“독일 통일에 대해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은 ‘통일은 조용히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식 통일을 강조하면 북한은 흡수 통일하겠다는 말로 들을 수밖에 없다. 통일 대박론도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 통일 달성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통일은 조용히 추진해야 한다. 지금 이 단계에서는 원칙을 강조하는 것보다 남북 관계에 실질적인 이득이 되는 접근을 했으면 한다.”

―한국이 경제력에 걸맞은 외교력을 발휘하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외교력은 우리의 국익과 생각을 국제사회에 반영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도 있다. 작은 나라 싱가포르가 매년 샹그릴라 회의를 개최해 각국 국방장관을 불러 모으고 특별 게스트로 정부 수반을 초청한다. 경제력과 군사력이 아닌, 싱가포르가 아이디어를 내고 노력한 결과다. 우리도 늘 불만 끄러 다닐 게 아니라 새로운 제안을 통해 논의를 주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이 강대국 사이에 끼인 새우 신세라는 자조적 평가도 있지만 이제는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최소한 돌고래는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교량 역할을 할 수 있다.”
美中-日中 사이 교량 역할 필요

한 전 장관은 한국이 할 수 있는 교량 역할의 사례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외무부 장관 재직 시절의 비화(秘話)를 공개했다. “1994년 6월 북한이 핵 연료봉을 인출해 위기가 고조됐다. 급히 베이징으로 달려가 ‘중국이 유엔에서 대북(對北)제재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북한에 통보해야 북한이 협상에 나올 것’이라고 중국 측을 설득했다. 얼마 뒤 주한 중국대사가 찾아와 ‘북한에 통보했다’는 훈령을 받았다고 전했다. 진행 상황을 미국에 알렸다. 며칠 뒤 북한이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평양으로 초청했다. 당시는 북한이 유엔 제재를 두려워하던 시절이어서 한국의 중재외교가 통했다.”

일본의 집단자위권과 미사일방어(MD) 체제 구축처럼 한국과 미국 사이에 견해가 다른 분야에 대한 해법도 제시했다. “그런 문제들이 바로 우리가 미국과 허심탄회하게 협의를 해야 하는 대상이다. 1990년대 김영삼 정부 외무장관으로서 북핵 문제를 다룰 때는 미국 파트너와 가장 좋은 해결 방법을 찾기 위해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는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 협의를 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 시절 주미대사 때는 북핵을 포함해 번번이 미국과 부딪쳐야 했다. 당시 한미 대통령의 시각이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현재 한미처럼 이념적인 차이가 없을 때 솔직한 소통을 하면 쉽게 최적의 해법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주요 사안에 대해서는 우리가 먼저 미국이나 일본에 입장을 밝히고 설득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韓 전 장관의 국제 인맥
페리 前국방, 햄리 CSIS소장, 헨리 키신저, 라이스 前국무…


올 해 73세인 한승주 전 장관이 여전히 국내외에서 권위 있는 분석과 대안을 제시하는 ‘현역’으로 활동할 수 있는 비결 중 하나가 외교 국제정치 분야의 인맥이다. 특히 전현직 고위 관리를 포함한 다양한 미국 인사가 그의 확실한 정보원이다.

그가 밝힌 미국 인맥은 헨리 키신저,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과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 스티븐 해들리, 토머스 도닐런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스트로브 탤벗 브루킹스연구소 소장, 존 햄리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소장 등 끝이 없다. 성 김 주한 미대사와 커티스 스캐퍼로티 주한미군사령관을 포함해 서울에서 활동하는 미 인사들도 자주 만난다. 한 전 장관은 “주요국 당국자와 전문가들의 발언 및 논문 등을 면밀히 추적하고 e메일로 교신하며 각국의 전략과 정책 변화를 파악한다”며 ‘국제정세 공부법’을 소개했다.

미국외교협회(CFR)가 4월 24일 ‘북한의 핵위협: 21년간의 역경을 평가하며’를 주제로 주최한 대담토론도 한 전 장관의 국제적 지명도를 보여주는 행사였다. CFR는 북핵 해법의 지혜를 듣기 위해 한미 양국의 외교 원로로서 북핵 협상을 주도한 경험이 있는 한 전 장관과 스티븐 보즈워스 전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를 초청했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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