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66>개화산에서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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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산에서
―박철(1960∼ )

히말라야를 다녀왔다는 한 사내가
껌을 밟고 섰듯 우렁차게 먼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 낮은 산이 더 오래된 산이다
조용한 산이 높은 산이다
눈보라에 이것저것 다 내주고
작은 구릉으로 어깨를 굽히고 앉았으나
부러울 것 없네 손자 손녀도 우습게 매달리고
때론 사이클 탄 이가 우주로 떠오를 듯 달려 나가기도 하니
언덕에 섰는 갈참나무나 자귀나무도 마음이 연해
별다른 벌레들 기어들지 않고
청설모며 족제비가 종갓집을 이루는 터
내가 오늘 먹을 걱정에 터벅거리며 산을 내려오자
산은 슬며시 나의 옷깃을 잡으며
곧 볍씨 뿌리는 들판이 될 것이라 귀띔을 한다
따뜻한 바람을 모아 군불 지피는
끝내 고향이 되어버린 아우 같은 산
머리 긁적이며 돌아보니 오솔길은 발장난을 치고
묵은 꽃향기 수북이 손등처럼 쌓여 있다

그렇구나. ‘사실 낮은 산이 더 오래 된 산’이겠구나. 히말라야 산맥은 고도 7000∼8000m인 산이 즐비하다. 화자가 사랑하는 개화산은 고도 128m. 산은 점점 자라지 않고 낮아질 테다. 지질학에 인간적 상상력을 보태, 8000m가 128m가 되기까지 개화산이 ‘눈보라에 이것저것 다 내준’ 세월을 생각해 보라. 히말라야야, 우습게보지 말라고!

이 사내 하필 화자 앞에서 히말라야 다녀온 걸 뽐냈을까. 그는 감탄과 동경을 기대했다가 화자의 삐딱한 반응에 당황했을 테다. 높고 험준하고 필경 아름답기도 할 히말라야나 거기 오르는 이들의 기백과 도전정신을 화자가 무시하는 건 아닐 테다. 그 사내의 ‘껌을 밟고 섰듯’한 태도가 화자의 비위를 건드린 것일 테다. ‘껌을 밟고 섰듯’은 높은 산에 오른 이가 낮은 산밖에 모르는 이를 껌처럼 밟고 섰다는 뜻이기도 하고, 잘난 척하지만 네가 발 디딘 곳이 기껏 씹다 버린 껌 높이 아니냐는 뜻이기도 하다. 사내의 말이 ‘우렁차게 먼 이야기’, 즉 와 닿지 않는 큰소리로 들릴 수밖에.

화자는 ‘조용한 산이 높은 산’이라 생각한다. 화자처럼 ‘오늘 먹을 걱정에 터벅거리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을 ‘작은 구릉으로 어깨를 굽히고 앉아’ 말없이 품어주는 개화산 같은 산. 가까이 그 산이 있어 ‘별다른 벌레들 기어들지 않는’ 갈참나무나 자귀나무처럼 마음 여린 사람들이 걱정을 씻고 힘을 얻는다. 저마다 흘러온 곳이 다른 주민들에게 여기가 ‘끝내 고향이 되어’ 버리게 하는 개화산. ‘낮은 곳’의 유장한 삶에 대한 시인의 사랑과 옹호가 배어나는 시다.

황인숙 시인
#개화산에서#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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