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진녕]김한길의 꽃놀이패 기초선거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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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녕 논설위원
이진녕 논설위원
안철수 의원의 입이 거칠어졌다. 그제 새정치연합 공동위원장단 회의에서 그는 기초선거 정당공천제 폐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새누리당을 향해 “잔꾀만 내놓고 있다” “비겁한 태도” “언어도단의 정치”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험구다. 1년 가까이 정치를 하더니 기성 정치인을 닮아가는 것인가, 정치에 자신감이 붙어서인가. 아니면 지지율이 하락 추세인 데다 덜렁 무(無)공천을 선언하고 나니 초조해서인가.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후보가 공통으로 약속한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의 법제화는 사실상 물 건너갔다. 새누리당이 거부해서다. 그러나 이 약속은 다른 공약들과는 성격이 다르니 어느 일방이 안 지킨다고 다른 쪽도 지키지 말라는 법은 없다. 법제화로 한꺼번에 할 수 없게 됐다는 것뿐이지 개별적으로는 내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다.

새누리당은 공천 폐지 대신 상향식 공천제를 택했다. 정당의 책임정치를 포기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건 그것대로 지키면서 실질적인 공천권을 국민에게 주는 게 진정한 정치개혁이라고 강조한다. 그럴싸하다. 사실 국회의원까지 포함하는 상향식 공천제는 한국 정치사에서 혁명적인 발상이다. 그렇다 해도 약속을 파기했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상향식 공천제가 제대로 실천될지도 미지수다. 이전의 전략공천과는 다르지만 우선공천이라는 뒷문이 열려 있다. 현역이 절대 유리하다는 부정적인 전망도 나온다.

안 의원의 새정치연합은 단독으로 무공천을 선언했다. “정치의 근본인 약속과 신뢰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택한 것이다. 사실 실리적으로는 손해가 뻔하다. 안철수를 업고 기초선거에 나서려던 사람들이 문 앞까지 왔다가 발길을 돌린다. 문 안으로 들어섰던 사람도 선거에 나서려면 떠나야 한다. 정당원은 무소속 출마가 안 되기 때문이다. 한 명의 우군이 아쉬운 판에 엄청난 인력 손실이다. 전국 방방곡곡의 기초단체와 기초의회에 안철수의 깃발을 펄럭이게 할 수 있는 기회도 날렸다.

창당 작업만도 버거운데 광역선거 후보에다 기초선거 후보까지 물색하려니 현실적으로 역부족이라 단점은 가리고 장점은 부각시키는 ‘포장전략’ 아니냐고 삐딱하게 보는 시각도 없지 않다. 설사 그렇다 해도 약속을 지켰다는 대의(大義)가 작아지지는 않는다.

민주당은 이쪽저쪽을 놓고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김한길 대표는 28일까지 최종 의견을 표명하라고 박 대통령을 압박하는 한편 어제는 안 의원을 만나 의견도 나누었다. 대선에서 폐지를 공약했고 일찌감치 당론으로 추인한 마당에 지금에 와서 없었던 일로 하기가 여간 곤혹스럽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무공천을 택하면 ‘핵심 당원 3만 명 정도가 탈당할 수 있고, 새누리당에 어부지리(漁夫之利)를 안겨줄 수 있다’(최재천 전략홍보본부장의 표현)는 우려도 무시하기 어렵다.

현실적으로 보면 어느 쪽을 택하든 김 대표로서는 손해 볼 게 없다. 폐지 약속을 지키면 명분에서 확실하게 새누리당보다 우위에 설 수 있다. 수도권에서는 현역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의 다수가 민주당 사람들이라 공천을 안 하더라도 선거에서 별로 불리할 게 없다. 새정치연합의 바람몰이가 걱정됐는데 무공천을 밝혔으니 그 걱정도 덜게 됐다.

약속 파기 쪽으로 결론 내더라도 “우리는 할 만큼 했는데 새누리당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하면 된다. 무공천 시 감내해야 할 불이익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안 의원 쪽은 무공천이니 더이상 경쟁상대로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명분은 다소 퇴색할지 모르나 보다 큰 실리를 챙길 수 있으니 선거 치르기가 한결 편하다. 이런 걸 바둑에서 꽃놀이패라고 한다.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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