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海 임시정부 1호 청사 위치-가옥 형태 첫 확인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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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성 서울시립대 교수팀 1920년 지적도 분석

1919년 4월 10일 상하이 임시정부를 수립한 제1차 임시 의정원 회의가 열린 것으로 추정되는 김신부로 22호의 현재 모습. 1920년 제작된 지적도상의 건물과 마찬가지로 서양식 3층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곳을 답사한 배우성 서울시립대 교수는 “증축이나 개축 여부를 확인해 봐야겠지만 임정 수립 당시 건물 구조와 매우 유사해 보였다”고 말했다. 서울시립대 HGIS 연구팀 제공
1919년 4월 10일 상하이 임시정부를 수립한 제1차 임시 의정원 회의가 열린 것으로 추정되는 김신부로 22호의 현재 모습. 1920년 제작된 지적도상의 건물과 마찬가지로 서양식 3층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곳을 답사한 배우성 서울시립대 교수는 “증축이나 개축 여부를 확인해 봐야겠지만 임정 수립 당시 건물 구조와 매우 유사해 보였다”고 말했다. 서울시립대 HGIS 연구팀 제공
대한민국 상하이 임시정부가 탄생한 최초의 임정 청사인 ‘임정 청사 1호’의 위치와 가옥 형태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배우성 서울시립대 교수(국사학)가 이끄는 역사지리정보시스템(HGIS) 연구팀은 임정 수립 이듬해인 1920년 제작된 지적도 ‘프랑스 조계지 영역’에서 제1차 임시 의정원 회의(1919년 4월 10일) 개최 장소로 알려진 상하이 김신부로(金神父路) 22호의 정확한 위치와 가옥 형태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프랑스 조계지 관리당국에서 만든 이 지적도상의 김신부로 22호 자리에는 서양식 건물로 보이는 건물 평면도와 3층 건물임을 알려주는 ‘3F’라는 붉은색 스탬프가 찍혀 있다.

김신부로 22호는 원래 독립운동가 현순(玄栒·1880∼1968) 목사의 주소지다. 1차 임시 의정원 회의의 개최장소 위치는 정확한 번지수 없이 ‘김신부로’로만 기록이 전해지는데, 학계에서는 이곳을 ‘임정 청사 1호’로 지목해 왔다. 현재 상하이에 복원된 임정 청사는 가장 오랜 기간(1926∼1932년) 청사로 사용한 보경리(普慶里) 4호 청사다.

연구팀이 확인한 건물 양식(서양식 3층 건물)은 1차 임시 의정원 회의 참석자 이광수의 회고 내용과도 부합한다는 점에서 이곳이 최초 임정 청사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광수는 “(의정원 회의를 하려) 모인 방은 2층 동쪽 기름하게 생긴 방이었다…세를 주고 얻은 꽤 좋은 프랑스 조계의 양식주택이었다”고 기록했다. 최소 2층 이상의 서양식 주택이라는 조건을 만족하는 것. 또 당시 한인 독립운동가의 동향을 본국에 보고한 일본 총영사가 현순 목사의 거주지에 대해 “프랑스부인(佛人夫人)의 댁인 듯”이라고 설명한 사실과도 부합한다.

19∼21일 상하이 답사를 다녀온 배 교수는 “오늘날 서금2로(瑞金二路) 48농(弄) 18호에 해당하는 김신부로 22호 자리에는 지금도 서양식 3층 건물이 있다”며 “증·개축 여부를 확인해야겠지만 1920년 지적도상의 건물 구조와 상당히 유사해 보인다”고 말했다.

과거에도 김신부로 22호를 찾으려는 노력이 있었다. 1994년에는 지번 변동 사실을 모른 채 민간단체 주도로 서금2로 22호에 있던 주택을 매입·해체해 국내에 들여왔다가, 보훈처 현지조사 결과 엉뚱한 건물을 들여온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당시 현지조사단이 판단 근거로 삼은 1940년 지적도에는 김신부로 22호로 표시된 가옥이 4개나 돼 임정 수립 당시의 건물 양식이나 정확한 위치는 확인하지 못했다.

연구팀은 1920년 3월 1일, 독립선언 1주년 기념식이 열린 ‘올림픽(夏令匹克) 대극장’의 외경 사진과 당시 지도상 위치도 찾아냈다. 이 건물의 외경 사진과 당시 거리 이름으로만 전해져 온 극장의 위치를 정확히 찾은 것도 처음이다.

연구팀은 올림픽 대극장을 비롯해 1921년 개천절 경축식이 열린 ‘영파회관(寧波會館)’, 상하이 한인들의 주요 집회장소로 애용된 교회 ‘모이당(慕爾堂)’의 지도상 위치 값을 지리정보시스템(GIS)에 입력해 분석했다. 그 결과 이들 장소가 모두 한인 거주지가 있던 프랑스 조계가 아닌 일본인 영사관이 있었던 공공 조계에 있었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추가로 확인했다.

배 교수는 “일본인이 많은 공공 조계지는 한인의 ‘사지(死地)’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일본의 경찰권이 미치지 못한 1920년대 초만 해도 상하이 한인들이 다양한 외국인에게 정치적 의사를 적극 알리려고 공공 조계를 집회장소로 선호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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