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퍼 화지 “미국서 자랐지만 토종랩 할 겁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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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앨범 1집 ‘EAT’ 무료 대방출 화제몰이 래퍼 화지

‘시나리오 둘. 신이 되거나, 신이 되거나. 그 말은 즉, 밟거나, 매일 밟히거나.’(‘새로운 신’) 래퍼 화지는 “이상(李箱)은 읽어본 적 없지만 콜롬비아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내 롤 모델”이라고 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시나리오 둘. 신이 되거나, 신이 되거나. 그 말은 즉, 밟거나, 매일 밟히거나.’(‘새로운 신’) 래퍼 화지는 “이상(李箱)은 읽어본 적 없지만 콜롬비아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내 롤 모델”이라고 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이쁘장한 색안경을 벗어제끼고 보니 세상은 생각보다 불투명한 색이고, 나이테를 하나둘씩 파먹으면서 그 위로 색칠하는 법을 까먹어갔어.’(화지 ‘페티시’ 중)

분당 박자 수 90을 밑돌며 허우적대는 느린 비트. 미니멀하지만 이따금 몽롱한 화성을 내비치는 무채색 악곡. 흐름을 타고 거슬러 각운을 맞추는 금속성의 중저음 목소리. 래퍼 화지(본명 송석하·26)는 독한 도시를 허우적대는 20대 중반의 삶을 직설과 상징을 오가는 큰 낙차의 수사(修辭)로 그려낸다.

화지는 요즘 언더그라운드 힙합 쪽에서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지난달 정규 1집 ‘EAT’(이트)를 발표하면서 누구나 전곡을 인터넷에서 공짜로 내려받을 수 있게 했다. 데뷔앨범을 통째로 공짜 배포한 것은 국내외 대중음악사를 뒤져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다운로드 수는 3만5000회를 넘어섰다. 미국 유명 래퍼들의 무료 공개 음반 다운로드 수에 비견할 수치다. 비정규 앨범(통칭 ‘믹스테이프’)을 무료로 배포하는 경우가 흔한 힙합 쪽에서도, 이번처럼 정식 스튜디오에서 녹음과 프로듀싱을 거친 정규 음반을 통째로 푸는 경우는 없었다. 근 몇 년 새 듣기 힘들었던 독특한 스토리텔링과 랩 실력, 중독적인 악곡이 입소문을 키웠다. ‘EAT’는 서울을 배경으로 한 해피엔딩 없는 청각적 누아르 영화 같다.

최근 서울 세종로에서 만난 화지는 “솔직히 제 실력은 자신이 있었는데 인지도가 높지 않아 극단적 선택(무료 배포)을 한 건데 의도대로 된 것 같다”며 웃었다.

‘날 피폐하게 하는 것들로서 나를 위로해 병든 청춘 자아의 재발견이란 말을 내두르며 나를 방어할 뿐 이 도시의 역병, 코를 막기엔 숨이 차서 되려 그걸 반기는 법을 배워 내 나이 스물다섯’(‘스물다섯’)

화지는 랩에 영어 문장을 섞지 않는다. 이상의 ‘날개’나 ‘권태’의 책장을 마주하듯, 무표정하되 복잡한 수식구의 한글로 독창적 랩 풍경을 그리는 게 그의 장기다. 부모님을 따라 다섯 살 때 미국에 건너간 그는 고교 시절 정치적 메시지를 앞세우는 미국의 언더그라운드 래퍼 이모털테크닉의 음악을 듣고 영어로 랩을 시작했다.

“한국어로만 랩 하기 시작한 지 고작 3년”이라고 했다. ‘말 화(話)’에 ‘종이 지(紙)’를 붙여 ‘화지’다. “랩보다는 글, 냄새가 맡아지고 그림이 그려지는 글을 쓰겠다는 게 철칙이죠.” 미국 인디애나대 경영학과 3학년에서 학업을 멈추고 2011년 초 귀국해 한국 힙합에 뛰어들었다. “한글만의 과학적이고 아름다운 매력 때문에요. ‘ㄷ’ ‘ㄹ’ ‘ㅁ’ ‘ㅂ’이나 된소리가 음절마다 이어지면서 또르르 굴러가는 소리가 좋았죠. 습관처럼 수첩을 들고 다니면서 랩을 적었어요.”

그의 랩에는 성(性)에 대한 묘사 수위도 높다. 트위터 글을 심의하는 기관이 없듯 무료 배포 음원에는 심의가 없다.

“성인이 돼보니 사람들 속에 한 마리씩 키우는 괴물이 보이더라”는 화지는 음원에 이미지 파일로 첨부한 디지털 속지 첫머리에 ‘내 젊은 날들을 고스란히 담았다’는 문구를 써 넣었다. 그는 “나처럼 재밌고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을 희망 없는 친구들에게 해주는 게 음악적 목표”라고 했다. “말해주고 싶어요. ‘꿈꿔도 괜찮다’고, ‘네가 꾸고 싶은 미친 꿈 다 꿔도 괜찮다’고. 그러려면 이제 제가 아이콘이 돼야죠.”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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