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자” 석달전 친구의 한마디에… 어제도 잠을 설쳤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25일 03시 00분


코멘트

[말이 세상을 바꿉니다]<2부>당신을 죽이고 살리는 말
불면증의 주범, 나쁜 말

얼마나 됐을까. 불안한 마음을 꾹 부여잡고 곁에 있는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벌써 오전 3시. 심장 소리가 귀에 들릴 듯 요동치기 시작한다. 긴장감에 머리카락이 빳빳하게 곤두서는 듯하다. 자야 하는데, 벌써 3일짼데, 내일 기말시험을 보는데…. 따뜻한 우유를 한잔 들이켜 본다. 크게 심호흡도 해본다. 넓은 목장에 뛰노는 양떼를 머릿속에 그리며 그 수를 세어본다. 한 마리, 두 마리….

소용없다. 세면 셀수록 오히려 정신은 더 또렷해진다. 머리는 빡빡하고 온몸은 두들겨 맞은 듯 욱신욱신 피곤하다. 그런데 미치겠다. 잠이 오지 않는다.

○ 잠들지 못하게 만든 한마디, ‘배신자’

석 달 전, 그때였다. 유선이(가명·16)에게 ‘무서운’ 친구가 생긴 건. 그 친구는 이미 1년 전부터 알았다. 사이가 그렇게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알고만 지내던 사이. 하지만 그 일이 있고부터 그는 무서운 친구가 됐다.

그 친구가 때리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심한 욕설을 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때 알았다. 그 친구가 다른 친구들을 만나면 “유선이는 앞에선 웃는데 뒤에서 뒤통수를 치는 아이”라고 말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왜 그런 말을 할까. 도대체 영문을 몰랐다. 그렇다고 대놓고 따지지도 못했다. 친하지도 않은 사이다 보니.

‘좀 지나면 조용해지겠지.’ 이렇게 생각한 게 화근일까. 얼마 뒤, 악몽이 시작됐다. 몇몇 친구가 대놓고 유선이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배신자”라고. 그리고 그 즈음부터 유선이는 밤마다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불면증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요즘은 가끔 환청도 들린다. 누군가 “배신자” “뒤통수치는 ×” “상종하면 안 되는 ×”이라 말하며 수군거리는 듯하다. 밤에 잠을 못 자니 수업에 집중하기도 힘들다. 입맛이 없어져 몸무게는 4kg이나 줄었다. 무엇보다 힘든 건 이 불면증이 얼마나 오래갈지 모른다는 막막함. 유선이는 “차라리 몸이 아프면 약을 먹으면 괜찮아지는데…. 이건 침대에서 매일 나 자신과 전쟁을 치러야 하니 너무 힘들다. 이젠 지쳤다”며 울먹였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급증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발표한 진료비 통계에 따르면 수면장애로 병원을 찾은 사람은 지난해에만 40만 명이 넘었다.

‘나쁜 말’은 불면증을 불러일으키는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다. 욕설, 막말 등 나쁜 말이 유선이처럼 잠 못 자는 사람들을 낳고 있다는 얘기다.

보통 나쁜 말로 인한 불면증은 ‘적응 불면증’이라 불리는 급성 불면증과 관계가 깊다.

회사원 안모 씨(32)는 잠들기 직전 항상 그날 회사에서 들은 갖가지 폭언들을 떠올린다. 회사에 있는 동안엔 너무 바빠서 신경 쓰지 못했던 말들. 하지만 침대에 눕고 잠들기 전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때면 그날 상사에게 들었던 말들이 차례차례 떠오른다. 생각은 깊어지고 그 말을 곱씹다 보면 화가 난다.

이처럼 불쾌했던 말이나 상황을 반복적으로 떠올리는 과정을 정신의학적으로는 ‘반추(rumination)’라고 부른다.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홍진표 교수는 “반추는 사람을 더 우울하고 불안하게 만든다. ‘왜 반박하지 못했을까’ 후회하고 자책하는 과정에서 자존감이 떨어진다. 또 무력감까지 생긴다. 정신이 지치다 보니 몸에서 불면증이란 반응이 오게 된다”고 설명했다.

○ 뇌에 각인된 나쁜 말이 불면증 불러

서울 양천구 신월동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내 범죄분석실. 최면을 통해 범죄의 단서를 찾아내는 곳이다. 최면은 일상적인 자극들을 차단해 의식의 집중 상태를 만들어 주는 과정이다. 그렇게 최면에 들어가면 피최면자들은 그동안 잠재적으로 억압돼 표출시키지 못했던 상황들을 떠올리고 얘기한다.

피최면자들의 반응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들이 범죄 상황 등에서 들었던 ‘말’에 대한 기억. 함근수 국과수 범죄분석실장은 “때론 폭행당한 기억보다도 어떤 말을 들은 기억이 또렷한 경우가 많다. 말 자체가 매우 강렬한 자극이라 뇌에 뚜렷이 각인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게 떠올리는 말은 단서 발견에도 큰 도움을 준다.

욕설 등 막말은 일반적인 말보다 뇌에 몇 배 더 강렬한 자극을 준다. 뇌에서도 감정 처리를 전담하는 곳이자 위협 감지 센터인 편도(扁桃)에 매우 뚜렷이 각인된다.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이재헌 교수는 “편도는 막말을 들을 때마다 예민해지고 활성화된다. 충격적이고 중요한 정보로 인식해 또 겪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편도가 흥분하면 주변에 위치한 시상하부도 흥분한다. 이에 자율신경계 중 교감신경 역시 긴장한다. 교감신경이 흥분하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숨이 갑갑해진다. 뇌의 각성도 일어난다. 결국 뇌와 신체가 극도의 긴장 반응을 보이면서 불면증까지 생긴다는 얘기다.

여성이나 청소년은 폭언으로 인한 불면증에 노출될 가능성이 더 높다. ‘불안감수성’은 같은 자극을 줬을 때 불안 증상이 어느 정도인지 말해주는 지표. 일반적으로 불면증은 불안감수성이 높을수록 자주 생긴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청소년은 성인에 비해 불안감수성이 상대적으로 높다.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병수 교수는 “특히 청소년 시기는 자아존중감이 형성되는 시점이라 폭언으로 자아존중감이 떨어지면 그로 인한 불면증이 오래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서영석 인턴기자 연세대 의학전문대학원 본과 4학년
#언어폭력#불면증#뇌 각인#각인효과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