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석 기자의 스포츠 인생극장]<12>원조 빙상 女帝 전이경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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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수’ 그 이후를 향해…

보름 가까이 밤잠을 설치게 했던 소치 겨울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러시아로 귀화한 안현수(빅토르 안), 피겨 여왕 김연아와의 작별…. 이번 올림픽은 그 어느 때보다 국민의 마음을 무겁게 한 순간이 많았다. 한국 선수로는 겨울올림픽 최다인 금메달 4개를 딴 원조 빙상 여제 전이경 대한빙상경기연맹 이사(38). 민감한 시기라며 몇 차례 인터뷰 요청을 고사했던 그는 전화로나마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 현수가 많은 걸 해줬다

올림픽에 3회 연속 출전해 2회 연속 2관왕에 오른 전 이사는 1999년 은퇴한 뒤 TV 해설가로 3회 연속 현장을 지켰다. “처음으로 올림픽을 집에서 편하게 보는가 했더니 오히려 더 울컥거렸다.” 대회 초반부터 ‘안현수 후폭풍’에 시달렸던 후배들의 마음고생을 자신의 일인 양 안타까워했다. 때로 긴 한숨도 내쉬었다.

“현수를 주니어 시절부터 눈여겨봤다. 진짜 특별했다. 천재 스타일이다.” 이번에 수면 위로 불거진 파벌싸움, 밀어주기 등은 전 이사에게도 생소하지 않은 단어. “내가 선수 때도 있었다. 국제대회에서 에이스 몰아주기로 도움을 받거나 동료를 위해 양보한 적도 있다. 때론 희생해야 하는 현실에 화가 났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개인뿐 아니라 전체가 살아야 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젠 세대가 변했다. 현수도 관점이 달랐을 뿐이다.”

전 이사는 “어쨌든 현수가 의도했든 안 했든 한국 선수들은 큰 상처를 받았다. 그래서 밉기도 하지만 충분히 이해한다”고도 했다. 그는 한국 대표팀 운영 시스템에 대한 지적도 빼놓지 않았다. “예전처럼 때리고 욕하는 건 아니지만 태릉선수촌 훈련 방식은 여전히 강도 높은 스파르타식 위주다. 오전 5시에 일어나 바로 스케이트를 타는 훈련 스케줄은 20년 전이나 마찬가지다. 현수가 러시아에서 했다는 맞춤 운동을 한국에서는 하기 힘들다. 몸이 안 좋다고 운동에 빠질 수도 없다. 무릎을 다친 현수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일 수 있다. 체격이 뒤지는 한국 선수에게 체력은 물론 중시돼야 한다. 그래도 훈련량보다는 질을 따지는 방식이 필요하다.”

○ 8개월 만에 나온 세상, 운동으로 빛을 보다.


전 이사는 1.7kg의 미숙아로 태어났다. 보름 정도 인큐베이터 신세를 졌다. 장 협착증으로 생사의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다. 그래서 운동을 열심히 했다. 수영을 하다 6세 때 스케이트와 인연을 맺었다. 살려고 땀을 흘렸던 전이경은 초등학교 졸업반 때인 1988년 대표팀에 뽑혀 태릉선수촌에 들어갔다. 그때 나이 12세였다. 그로부터 10년 6개월 동안 태극마크를 달았다. 하루에 8시간씩 차가운 빙판에서 뜨거운 입김을 내뿜던 노력형이었다. 쇼트트랙 선수들이 힘들어하는 쿠션(앉았다 일어서기)을 한 번 하면 1000개씩 했다. 한여름에 서울 국립극장에서 남산 꼭대기 팔각정까지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했다. 서울 잠실 롯데월드 아이스링크에서 일반인들과 부대끼며 스케이트를 타기도 했다. 신체 접촉이 빈번한 실전에서 순간 판단력을 기를 목적이었다. “경기를 앞두고는 바나나, 미역뿐 아니라 김도 안 먹는 쇼트트랙 선수들은 운도 실력이라고 생각한다. 운은 훈련을 많이 하는 선수에게 온다는 믿음이 있기에 정말 고생한다. 하지만 빙상에서 넘어지는 허무한 결과 앞에 고개를 숙이는 운명을 지닌 사람들이기도 하다.”

○ 평창, 그 이후를 향해

1996년 중국 하얼빈에서 열린 겨울아시아경기 쇼트트랙 여자 결선에서의 일이다. 전 이사는 홈 텃세에 밀려 1위로 골인하고도 양양에게 금메달을 내줬다. 맨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지만 중국 주심은 0.02초 차로 양양이 앞선 것으로 판정을 내렸다. 그는 “연아는 정말 대단하다. 그런 경우에 누구도 웃을 수 없을 텐데….” 전 이사는 “홈 텃세는 어디나 있다. 나가노 올림픽 때 일본도 설상 종목에서 많은 메달을 가져갔다. 4년 뒤 평창에서 우리도 많이 챙겨야 한다. 대놓고 하라는 게 아니다. 겨울 종목은 경기장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우리 선수들이 충분히 훈련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손은 조금만 써야 하지 않을까(웃음).”

국민의 관심은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을 향하고 있다. 이번에 소치에서 겪은 설움을 되갚아 주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전 이사의 시선은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평창에서 좋은 성적도 중요하다. 엘리트 선수 육성뿐 아니라 겨울스포츠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노력이 절실하다.” 거액이 들어가는 올림픽 경기장과 인프라 조성은 국가 경제를 휘청거리게 할 수도 있다. 그는 “일반인들이 낯선 겨울스포츠 종목을 체험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일이 필요하다. 컬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건 고무적이다. 저변의 확대는 올림픽 시설의 사후 활용 극대화로 연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스피드스케이팅을 하다 쇼트트랙으로 전업한 전 이사는 은퇴 후 아이스하키 선수를 하기도 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 위원을 지내며 행정력도 키웠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현역 시절 타던 스케이트만큼이나 날카롭고 생생하게 들렸다.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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