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세형의 기웃기웃]이미 지나온 길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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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책 또 없어?”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이번 달만 벌써 세 번째다. 요즘 친구는 하루 종일 책만 보는지, 또 없어, 또 없어, 자꾸만 재밌는 책을 추천해달라고 졸라댄다. “글쎄, 내가 좋아하는 책들은 너도 거의 다 봤잖아.”, “그럼 넌 요즘 뭐 보는데?” 나는 요즘 ‘태백산맥’을 다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건 대학교 때 다 봤는데….” “그게 벌써 십 몇 년 전인데, 또 봐. 다시 봐도 재밌어.” 하지만 친구는 어쩐지 시큰둥하다. 하지만 나는 좋아한다, 봤던 책이나 영화를 또 보고 또 보는 것.

이제 막 보고 나온 영화인데도, 동행과 얘기하다 보면 내가 놓친 장면들이 분명 있다. 책도 그렇다. 이제 막 마지막 책장을 덮었는데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늘 새로운 것들이 있다. 아무리 집중해서 봤다 해도 우리의 기억은 완전할 수 없다. 인간의 기억에는 언제나 구멍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니 몇 달 전, 몇 년 전 읽었던 책들을 다시 볼 때면 ‘내가 정말 이 책을 읽었던가’ 싶을 정도로 생소해 마치 처음 보는 책인 양 다음 장이 궁금해 밤을 새우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큰 줄기와 결론을 대부분 기억하고 있다 하더라도, 바로 그렇기에 작가가 초반부터 섬세하게 엮어 놓은 복선들을 발견하는, 처음 볼 때는 절대 알 수 없었을 또 다른 재미가 생기기도 한다. 또 큰 줄거리 따라가느라 바빠 놓쳤던 소소하지만 주옥같은 장면들이 두 번째 볼 때는 눈에 들어오기도 하고, 같은 책이라 하더라도 내 나이와 상황이 달라짐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읽히기도 한다.

그러니, “좋은 책은 또 보고 또 봐도 또 재밌어”라고 한참이나 친구를 향해 떠들고 있자니 문득 며칠 전 다녀온 산행 생각이 났다. “전에도 왔던 길이라고!” 언제나 길잡이를 해주는 선배가 또 말했다. 그 뒤를 따르는 나는 또 이렇게 말한다. “그래요? 완전 처음 와 본 길 같은데?” 언제나 같은 산을 오르면서, 우리는 언제나 같은 대화를 반복한다. 물론 내가 길치이기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같은 산이라 해도 등산로는 워낙 여러 개라 늘 헛갈리기도 하고, 같은 등산로라 해도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내 마음에 따라 산은 늘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미 지나온 길을 돌아봐도 ‘어, 저 길이 내가 온 길 맞나’ 싶은 게 산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야, 책 그만 보고… 그냥 그 사람 만나.” 친구는 주저하고 있었다. 아주 많이 아파본 사람은 그럴 수 있다. 새로운 사랑이 다가와도 어차피 또 식어버릴 사랑, 빤한 사랑, 빤한 아픔, 그래서 주저주저, 친구는 요즘 몇 년 치 책을 몰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지나온 길이라고 해서, 네가 다 알고 있는 건 아니야.” 우리는 인간이다. 완벽할 수 없다. 이미 한 번 본 책이라고 해서, 그 책을 온전히 다 알고 있을 순 없다.

누군가를 한 번 만나봤다 한들 우리는 그에 대해 다 알고 있다 말할 수 없고, 스무 살을 이미 겪었다 한들 스무 살의 모든 것을 알고 있을 순 없다. 그러니 사랑 한 번 해봤다고 사랑에 대해 다 알고 있는 양 떠드는 사람을 누가 과연 믿어줄 수 있을까? 이미 한 번 지나온 길은 그저 한 번 지나온 길일 뿐, 다 겪은 길일 수는 없는 것. 그래서 세상엔 없는 것일지 모른다. 빤한 길도, 빤한 사람도, 빤한 사랑도.

강세형 에세이스트
#책#기억#사랑#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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