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못만나는 납북어부 김석만-문경식씨 가족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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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만에 남북 이산상봉]
“살아는 있는지 그것만이라도…”

사진으로만 만나는 동생 1972년 납북된 김석만 씨의 누나 김양자 씨가 20일 부산 연제구 연산동의 한 암자에서 동생의 사진을 들고 있다. 부산=서영수 기자 kuki@donga.com
사진으로만 만나는 동생 1972년 납북된 김석만 씨의 누나 김양자 씨가 20일 부산 연제구 연산동의 한 암자에서 동생의 사진을 들고 있다. 부산=서영수 기자 kuki@donga.com
문경식 씨
문경식 씨
1972년 2월에 납북된 김석만 씨(68)의 누나 김양자 씨(70). 20일 금강산에서 4년 만에 남북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흘렀다. 납북됐다 돌아온 사람을 통해 2003년 하나뿐인 남동생의 생사를 어렵게 확인한 뒤 이번까지 세 번의 상봉신청을 했지만 북한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생사 확인 불가’라는 답만 되풀이했다. 또다시 받아든 무심한 답장에 북한이 원망스럽다. 간첩의 가족으로 낙인찍혀 정부의 감시까지 받았던 지난 세월의 응어리도 풀리지 않는다.

○ “그저 생사라도 알았으면…”

종갓집의 2대 독자였던 김석만 씨는 어선 안영36호의 기관장으로 일했던 고종사촌 박봉만 씨의 권유로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함께 납북됐다. 어머니 박삼이 씨는 일제강점기 홋카이도(北海道) 탄광에 끌려갔다가 오른손을 못 쓰게 된 아버지를 대신해 옹기그릇 장사를 하며 겨우 생계를 꾸렸다. 김양자 씨는 “아들과 생이별한 뒤 어머니는 화병으로 10년 동안 병원 신세를 지다가 세상을 떠났다”며 눈물을 흘렸다.

이번에 처음으로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한 문중식 씨(71)한테 돌아온 북측의 답변도 납북된 동생 문경식 씨(63)의 생사를 확인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1967년 6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려운 집안 형편에 고등학교 진학도 못하고 있던 문경식 씨는 살림에 도움이 되겠다며 이웃집 선원의 권유로 어선을 타고 연평도 조기잡이에 나섰다. 그러나 한 달도 안 돼 납북됐다. 문중식 씨는 인터뷰 내내 같은 말을 되뇌었다.

“그때 돈을 빌려서라도 동생을 고등학교에 진학시켰어야 했는데….”

아직도 동생이 납북될 때 살았던 군산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그는 잘 나온 동생 사진조차 제대로 없는 게 늘 가슴 아프다. 막내아들을 잃은 뒤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교회를 다니던 어머니가 성경책에 고이 간직해온 동생의 사진은 어머니의 눈물로 얼룩져 있다. 어머니는 그렇게 늦둥이 아들을 그리워하다가 1985년 79세로 눈을 감았다.

○ “납북자 가족의 상처를 보듬을 때 됐다”

납북자 이산가족의 상처가 좀처럼 아물지 못한 데에는 한국 정부의 책임도 적지 않다. 김양자 씨는 “동생이 납북되고 나서 사복을 입은 경찰관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 와서 이것저것 캐물었다”며 “그토록 알고 싶은 동생의 생사는 말해주지 않으면서 집에 누가 왔다 가면 꼬치꼬치 캐묻곤 했다”고 말했다.

납북자가족모임 최성용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이 이산가족의 근본적인 대책을 강조한 만큼 납북자와 국군포로를 위한 정부 차원의 전담조직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중식 씨는 “경제적 지원보다 ‘납북자 가족들을 잊지 않고 있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더욱 절실하다는 것을 정부는 모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
#납북어부#남북 이산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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