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대1 뚫은 괴짜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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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나리오 대본 공모전 본선에 오른 12명
● 파파라치 세계 섭렵한 前 논술강사
● 영화에 빠져 제약회사 그만둔 40대
● 금융회사 영업팀장 맡고 있는 30대

CJ문화재단의 ‘프로젝트S’ 시나리오 공모전에 당선된 아마추어 작가들.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고 싶은 이들의 꿈이 영글어가고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CJ문화재단의 ‘프로젝트S’ 시나리오 공모전에 당선된 아마추어 작가들.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고 싶은 이들의 꿈이 영글어가고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19일 오후 서울 강남구 압구정CGV 영화관. 유명 투자배급사 쇼박스, CJ, NEW 관계자들과 프로듀서 등 150명의 눈이 일제히 스크린 무대로 쏠렸다. 30대 여성이 등장했다. ‘오디션’이 시작됐다.

여성은 오른손에 외제 자동차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열쇠를 흔들어 보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이 키가 뭔지 아시나요? 자랑하려고 꺼냈냐고요? 아닙니다. 오늘 선보이려는 제 작품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크린 앞에 선 여성은 전직 논술학원 강사 출신인 박진유 씨(33). 지난해 6월 열린 CJ문화재단의 시나리오 대본 공모전 ‘프로젝트S’에서 8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아마추어 시나리오 작가 12명 가운데 1명이었다. 이날 행사는 최종 시나리오 오디션이나 마찬가지다.

박 씨는 각종 포상금을 노리는 파파라치를 소재로 한 ‘포상에듀케이션’이란 작품을 출품했다. 이 작품을 위해 그는 각종 파파라치를 만나고 다녔다. 쓰파라치(쓰레기 불법 투기 감시), 학파라치(학원 감시), 약파라치(약사가 아닌 사람이 약을 판매하는 장면 적발)…. 아까 흔들어 보인 자동차 열쇠는 발표 때 눈길을 끌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 열쇠는 실제 자동차 열쇠가 아니었다. 이번 작품을 위해 1박 2일 일정으로 80만 원짜리 파파라치 수업을 들었고 그때 얻은 ‘몰래카메라’였던 것이다.

이날 참가자 중에는 박 씨처럼 이색적인 경력을 지닌 사람이 상당수 있었다. 제약회사를 다녔던 임창건 씨(42). 그는 “회사를 다니면서도 2001년부터 계속 시나리오를 썼다. 어렵게 휴가를 내 단편영화를 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죽을힘을 다해 써보고 싶다’는 생각에 2010년 말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시나리오를 준비했다.

임 씨가 이번에 출품한 작품은 ‘연수’. 44세 여자 앵커가 22세의 아들 친구와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다. 봄인데도 눈발이 흩날리던 지난해 3월 초, ‘봄을 가장 기다리는 사람은 사랑에 좌절해본 사람이 아닐까’란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고 했다. 금융회사 영업관리팀장인 이창수 씨(36)는 군대에서 막 전역한 사람이 성관계만 하면 다시 군대시절로 돌아간다는 설정의 ‘리프레인 러브’로 당선됐다. 대학 때 전공인 국어국문학을 향한 꿈은 직장생활에도 접히지 않았다.

노인 고독사, 6·25전쟁, 가식적인 리얼리티 TV쇼를 소재로 한 시나리오가 차례차례 발표됐다. 발표가 끝난 후 제작자들과 작가들 간의 개별 비즈니스 미팅이 이어졌다. 당장 계약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제작사로부터 “영화로 만들어봅시다”란 말을 들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제작까지는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채택되지 못하고 영영 묻혀 버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영화가 되기까지는 투자와 제작까지 엎어지고, 메쳐지고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그래도 설레네요.”

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프로젝트S#CJ문화재단#시나리오 대본 공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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