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넘게 외출도 못한 여공들, 쓰레기통 잔반 주워 먹어”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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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일제강점기 ‘영등포 공장지대의 25시’ 펴내

일제강점기 서울 영등포에 있던 면방직 공장. 이 일대의 공장들에서는 10대 청소년들이 중노동에 시달렸다. 상당수가 속거나 반강제로 취직한 이들은 하루 15시간씩 일하는 게 예사였다. 구술에 따르면 한 노동자는 공장을 탈출한 뒤 함께 고생하던 동료들이 생각나 미숫가루를 부치기도 했다.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제공
일제강점기 서울 영등포에 있던 면방직 공장. 이 일대의 공장들에서는 10대 청소년들이 중노동에 시달렸다. 상당수가 속거나 반강제로 취직한 이들은 하루 15시간씩 일하는 게 예사였다. 구술에 따르면 한 노동자는 공장을 탈출한 뒤 함께 고생하던 동료들이 생각나 미숫가루를 부치기도 했다.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제공
“(일제강점기 공장에는) 경비가 많았어요. 서너 군데 초소를 만들어놓고 수용소 철망까지 해놓고. … 고되게 일시키고. 잘 먹지도 못해 고단하니깐. 밤중에 담 넘어서 도망가고 그랬어. 여공들은 감옥소야. 외출 안 해줘요. 아예 안 해줘요.”(90세 민석기 씨의 구술 중에서)

서울 영등포 일대는 일제강점기부터 유명한 공장지대였다. 전쟁 물자를 만드는 군수공장부터 면방직 철강 고무신 맥주 공장까지 다양한 산업 현장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수많은 조선 노동자들이 자신의 청춘과 눈물을 쏟아부었으나 이제는 이름도 기억되지 않는 잊혀진 역사로 남았다.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는 이러한 당대의 생활사를 복원하는 차원에서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까지 이 지역에서 일했던 이들의 구술을 모은 ‘영등포 공장지대의 25시’를 최근 펴냈다. 김현숙 전임연구원은 “공장에서 불철주야 고된 노동을 묵묵히 담당했던 노동자와 기술자의 피와 땀으로 오늘의 서울을 일궈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고 배경을 밝혔다.

당시 이 일대 공장의 조선인 수는 명확하진 않다. 시기별로 차이는 있으나 평균 1만 명 넘게 공장에서 일했던 것으로 보인다.

충남 홍성 출신인 김영환 씨(88)는 1941년 대일본방적회사에 취직했다. 말이 입사였지 마을 이장을 동원한 반강제적 모집이었다. 열다섯 어린 나이에 부모 허락도 필요 없었다. 덜컥 따라갔더니 15, 16명이 한방을 쓰는 기숙사에서 지내며 하루 12∼15시간을 일했다.

생활 여건은 상상을 초월했다. 배고파 서울에 왔는데 “애들 주먹만 한 보리빵”으로 저녁을 때울 때도 잦았다. 감자가루로 만든 풀을 얻어다 보일러실 수증기에 데워 먹기도 했다. 하루 종일 햇빛을 못 볼 때가 흔했고, 말썽이 없어야 한 달에 4시간 외출이 허락됐다. 김 씨는 “(1945년 8월 15일에) 경비가 없어 다들 그냥 밖으로 나와 흩어졌다. 영등포역에서 누군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치기에 그제야 해방된 줄 알았다”고 회상했다.

앞서 민석기 씨는 1938년 당시 명문이던 경성공업학교에 입학했는데 학생 때부터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방학이면 애국봉사란 미명 아래 조선 학생을 노동현장에 내몰았다. 당연히 일본 학생은 제외됐다. 그는 “김포비행장 닦을 땐 아예 인근 집에서 재우며 한 달씩 일을 시켰다”며 “일본 감독한테 삽으로 맞아 가며 소금만 찍은 주먹밥을 먹고 버텼다”고 말했다.

그에게 가장 안타까웠던 기억으로 남은 이들은 여공들이었다. 겨우 열일곱 안팎의 꽃다운 나이였지만 감옥 같은 기숙사 수용소에서 지냈다. 3년 넘게 바깥에 나가보질 못한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여공들이 식당 바깥에 내버린 쓰레기통 잔반을 주워 먹던 광경은 잊혀지질 않는다. 당시 열악한 여건 속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냈던 이들을 빗대어 ‘방직공장 사람이면(사람이 다가서면), 전봇대에 꽃이 핀다(피게 한다)’는 말도 유행했다.

영등포 공장에서 일하다 징용됐던 전을원 씨(90)는 당시 군수공장 용접기술공이던 친형의 고초를 잊지 못한다. 남들은 벌이가 낫다며 부러워했지만 일본 헌병대를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전 씨는 “뭔 의심만 생기면 한국 기술자를 끌고 가 사나흘씩 취조하는 일이 일상처럼 벌어졌다”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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