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윤 기자의 싱글노트]3차원 악보 오가는 4차원 천재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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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16일 일요일 맑음. 뱀파이어와 백색왜성과 나.
#96 VadimNeselovskyi ‘Spring Song’(2013년)

결국 시간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스물한 살 때, 우리 밴드의 공연 팸플릿에 자기 소개 대신 ‘난 아직 10대다’라고 썼다. 만 나이로라도 아직 10대라고 우기고 싶었던 거다. 어떤 피아니스트가 하루에 14시간씩 피아노를 친 이유도 그와 비슷할 거다. 인생은 유한하기 때문에, 죽거나 늙기 전에 다른 인간보다 인간들에게 더 인정을 받고 싶기 때문에.

정말 큰 달이 뜬 정월대보름에 공교롭게도 뱀파이어 영화를 봤다. 짐 자무시 감독(61)의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에 나오는 뱀파이어 아담(톰 히들스턴)은 어쩔 수 없는 천재 로커다. 400년 동안 기타를 친다면 얼마나 잘 칠 수 있을까. 20세기 초중반에 만들어진 오래된 기타와 각종 악기를 연주해 역시 그만큼 오래된 릴 테이프 녹음기에 기록하는 방식으로 그는 악기 박물관 같은 자택에서 홀로 음악을 만든다. 주로 아주 몽환적인 음악인 데다 익명에 가깝게 활동하는데 대중적인 인기까지 있는 모양이다. 미국 디트로이트의 쇠락한 교외에 비밀스레 숨은 그의 집에 잠입하는 10대 팬도 있으니까.

고전악기 류트 소리와 전기기타 노이즈가 서로를 휘감는 음악이 내내 인상적이었다. 스스로 전기기타 연주와 작곡을 하고 음반까지 내는 자무시 감독이 네덜란드의 류트 연주자 요제프 판 비섬과 함께 만든 음악들이다. 깁슨 기타와 스택스 레코드, 텔레풍켄 음향기기와 잭 화이트 얘기까지…. 음악 오타쿠라면 읽을 디테일이 많은 영화다. 백색왜성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커다랗고 기괴하며 아름다운 음향을 낸다고 아담은 말했다.

토요일에 본 우크라이나 출신 미국 재즈 피아니스트 바딤 네셀로프스키(사진)에게 좀 뱀파이어 같은 구석이 있었다. 초절기교와 창의력을 잘 조화시킨 연주를 펼친 그는 나보다도 한 살 어린데 버클리 음대 교수다. 10년 전 그와 함께 학생으로 버클리에 다녔다는 한국 피아니스트 V는 공연을 본 뒤 “바딤은 그때도 잘 쳤지만 10년간 크게 성장한 것 같다”고 했다. 음악은 시간의 예술이지만 물리적 시간으로 설명되지 않는 공간이 음표들 위에 있다. 4차원의 천재들은 가끔 악보 위의 3차원을 오간다.

내게 시간이 500년쯤 더 있다면 진지하게 전기기타를 다시 들어볼 의향이 있다. 하지만 만약에 어딘가 다른 차원이 존재한다면…. 하늘에 있는 누군가가 내게 백색왜성의 사운드를 들려준다면….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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