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정성희]‘아륀지 파동’과 쉬운 수능 영어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15일 03시 00분


코멘트
17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진 직후인 2008년 1월 이경숙 당시 이명박(MB)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은 “미국에서 ‘오렌지’라고 했다가 못 알아들어서 ‘아륀지’라고 했더니 알아듣더라”고 했다가 여론의 집중 포화를 맞고 사실상 보장됐던 국무총리 직이 날아갔다. 이후 ‘아륀지’는 실용영어에 대한 MB 정부의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단어가 됐다.

▷MB 정부는 “문법 독해 등 죽은 영어가 아니라 말하기 등 실용영어를 강화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고등학교만 졸업한 사람이면 외국인과 대화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다만 사교육이 아닌 공교육 시스템 내에서 영어 능력을 높이려고 했다. 원어민 교사 확대, 영어회화 전문강사제, 말하기가 포함된 국가영어능력평가시험(NEAT) 도입이 MB 정부 간판 정책이었다.

▷그로부터 5년,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고 난 뒤 원어민 교사에 대한 예산은 줄어들고 계약기간이 끝난 영어회화 전문강사는 일자리를 잃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영어 과목을 대체하겠다며 371억 원을 들여 개발한 NEAT는 백지화됐다. 그제 교육부는 박 대통령에 대한 업무보고에서 “영어 사교육 부담을 줄이기 위해 당장 올해부터 수능 영어를 쉽게 출제하겠다”고 밝혔다. 대입 자기소개서에 토플 토익 등 공인 영어성적을 기재할 경우 서류전형 점수를 0점 처리하겠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MB 정부의 영어교육 정책과는 반대 방향으로 선회한 것이다. 영어와 관련된 사교육비를 최대한 줄여보겠다는 박근혜 정부의 의지를 보여준다.

▷사교육비 부담은 영어보다 수학이 크다. 수학은 그대로 놔두고 영어만 표적으로 삼는 것도 괴이하지만 영어를 입시제도로 관리하겠다는 것이야말로 관료적 발상이다. 인터넷으로 세계가 연결돼 있고 국경이 사라지는 시대에 영어 능력은 개인에겐 더 좋은 일자리를 의미하고 국가에는 경쟁력이 된다. 모국어 사랑이 극진하기로 유명한 프랑스도 초등학교 1학년 영어교육을 의무화했다. 정부의 ‘영어 죽이기’가 초래할 후환이 걱정스럽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이명박#실용영어#원어민 교사#수능 영어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