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대로 시험땐 학부모 반발”… 일부학교 영-수 선행문제 출제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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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넘은 선행학습… 공교육까지 잠식

3년간 중국 주재원 생활을 하다 지난해 말 귀국한 김모 씨는 초등학교 4학년, 6학년 자녀가 겨울방학 동안 다닐 학원을 알아보다 좌절했다. 서울 강남 일대에서 6학년 대상 학원은 대부분 중3 영어 수학을 가르쳤고, 4학년 대상은 국제중 입시반의 시작이었다.

김 씨는 마지못해 수학 과외로 사교육 진도를 따라잡으려 했지만 아이들은 “한국에서 못 살겠다”고 난리였다. 김 씨는 “먼저 귀국한 선배들이 선행학습 타령을 하기에 각오는 했지만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고 말했다.

공교육이 무너지는 이유를 선행학습에서 찾는 이들이 많다. 선행학습은 1990년대만 해도 자기 자녀를 조금 더 앞서게 하겠다는 일부 학부모의 욕심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선행학습 바람이 전 학년, 대다수 학생에게 번지면서 이제는 국가가 정한 교육과정이 유명무실한 지경이 됐다.

○ 공교육 잠식한 선행학습

선행학습이 공교육을 잡아먹는 현상은 유치원부터 시작된다. 정부는 누리과정이라는 유치원 교육과정을 만들었지만 학부모들은 이른바 ‘영유’(영어유치원)에 열광한다. 영어유치원은 학원에 불과한데도 요즘은 “영유는 최소한 2∼3년은 보내야 한다”고 말하는 학부모들이 많다. 초등학교 교과과정의 영어는 3학년부터 시작되지만 사립초등학교들은 1학년 때부터 영어를 편성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수업도 영어로 진행하는 몰입교육을 하는 곳도 있다.

초등학교에서는 국제중에 가기 위해, 중학교에서는 특목고에 가기 위한 선행학습이 범람한다. 특목고는 고3 과정까지 선행학습을 해서 들어왔다는 전제하에 심화교과만 다루는 경우가 많다. 한국교육개발원의 조사에 따르면 선행학습 비율은 초등학교에서는 84.1%, 중학교는 87%, 고등학교는 89.5%로 점점 심해진다.

선행학습은 특히 수학과 영어에서 많이 이뤄진다. 영어는 미리미리 끝내 놓아야 중학교 때부터 다른 교과에 집중할 수 있고, 수학은 대학 입시에 절대적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이제는 내신 시험마저도 선행학습을 유도하는 학교가 늘고 있다. 지난해 교육부와 국민권익위원회가 공동 실시한 학생 설문조사를 보면 ‘학원에서 미리 배운 것으로 생각하고 학교 수업이 이뤄진 경우가 있다’는 응답이 29.5%에 달했고, 특히 수학은 45.5%나 됐다. 학교 시험에서 선행 문제가 출제된 적이 있다는 응답도 22.2%였고, 수학은 44.9%로 가장 심했다.

학업성취도가 높기로 유명한 서울 J여고 관계자는 “영어나 수학 시험은 한두 학기 진도를 넘어서는 문항을 많이 출제한다. 진도대로 시험을 내면 학부모들이 다른 학교보다 뒤처진다고 항의해서 어쩔 수 없다”고 전했다.

정부는 선행학습을 잡기 위해 지난해 4월 의원입법 형식으로 ‘공교육 정상화 촉진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려 했으나 국회가 파행을 거듭하면서 1년 가까이 표류하고 있다. 교육부는 2월 임시국회에서 이 법안이 통과돼야 신학기부터 최소한 학교에서의 선행학습이라도 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지만 불투명한 상황이다.

○ 모두를 피해자로 만드는 경쟁

‘공연장에 관객들이 가득 앉아 있다. 그중 한 명이 무대를 더 잘 보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앞이 안 보이게 된 뒷자리 관객이 따라 일어선다.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해 어느새 모두 다 일어난다. 결국 모두 앉아 있을 때와 시야는 다를 바 없다. 차이점은 모두 다리가 아프다는 것뿐이다.’

교육학자들이 선행학습의 폐해를 이야기할 때 자주 비유하는 상황이다. 앉으나 서나 결과는 마찬가지인데 서로 불필요한 경쟁을 하느라 힘만 든다는 얘기다.

사실 선행학습이 성적과 상관관계가 있다는 조사도 적지 않다. 교육개발원이 최근 발표한 ‘학교교육 내 선행학습 유발 요인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초중고 모두 영어 과목의 성적이 높은 아이들은 선행을 한 경험이 90% 정도로 조사됐다. 반면 영어 성적이 낮은 아이들의 선행 경험은 60∼70%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런 조사들은 선행학습을 한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는 것인지, 아니면 공부를 잘하는 기질의 아이들이 선행학습을 더 많이 하는 것인지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교육학자들은 장기적으로는 선행학습이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다고 우려한다. 학업성취도가 뛰어난 일부 아이들에게는 선행학습이 효과적이며 때로는 필요한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 학생들은 교과과정 진도를 제대로 따라가는 것이 인지발달 과정과 맞고 이해도도 높아진다는 진단이다.

김판수 숭실대 평생교육원 교수(교육공학)는 “선행학습을 한다고 학원을 전전하는 아이들 중에 그 내용을 제대로 아는 경우는 별로 없다”면서 “선행학습을 해야 남들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다. 진짜 선행해야 하는 것은 부모와의 관계, 교사와의 관계를 제대로 설정해서 아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김희균 기자 foryou@donga.com
#선행학습#사교육#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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