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하태원]출마와 불출마 사이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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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원 정치부 차장
하태원 정치부 차장
이제야 그걸 깨달았느냐는 핀잔이 들리는 것 같기도 하지만 정치인이 하는 말, 확실히 ‘해석(解釋)’이 필요한 것 같다. 정치부 차장이 된 뒤 더 절실하게 느낀다. 선거를 앞둔 시점에는 행간을 두 번, 세 번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여권의 한 ‘중진’ 인사가 최근 들려준 정치인의 말 독법(讀法)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를 인천시장으로 차출해야 한다는 말은 국회의장 욕심이 있는 사람이 퍼뜨리는 말이고, 남경필 의원이 경기지사로 가장 적임이라는 주장은 “내가 원내대표 되고 싶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란다. 황 대표는 국회의장이, 남 의원은 원내대표가 꿈이다.

심재철 새누리당 의원의 3일 당 최고위원회의 발언을 들어보자. “당의 필승 후보 중진이 나서야 당이 살 수 있다. 경쟁력 있는 중진으로 꼽히는 분은 아시다시피 서울 정몽준 의원, 경기 남경필 의원, 인천 황우여 대표다.”

액면만 보면 선당후사(先黨後私)를 강조한 ‘돌직구’로 들리지만 내심은 좀 다르다. 경기도지사 출마를 염두에 두고 있는 심 의원은 설 연휴 직전 남경필 의원을 만나 지사 출마 여부를 물었지만 확답을 받지 못했다는 것. 결국 심 의원이 진짜 던지고 싶었던 말은 “남 의원, 우물쭈물하지 말고 빨리 결정 좀 내려”라는 압박 아니었을까.

6·4지방선거 출마를 저울질하고 있는 정치인들의 말은 더 요지경이다. 이른바 ‘박심(朴心·박근혜 대통령의 의중)’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변수까지 얽히면서 고난도의 언어유희가 난무한다.

출마 선언 뒤 보름도 못돼 울산시장 불출마 결정을 내린 새누리당 정갑윤 의원은 “만인의 경쟁구도가 지역과 국가, 당을 위해 바람직한가에 대한 고민”을 후보 사퇴의 변(辯)으로 내세웠지만 속내는 복잡한가 보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물러난 정 의원은 속으로 “거 참, 정치 어렵네. 출마 선언도 마음대로 못하니 참내…”라고 되뇌었을 것 같다.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되는 정몽준 의원과 김황식 전 총리가 내뱉은 알쏭달쏭한 말의 향연 역시 유권자들에게 많은 혼란을 줬다. 출마가 기정사실로 굳어지는 분위기지만 여전히 “출마한다”는 명쾌한 선언은 없다.

우리 정치인이 출마 여부를 놓고 신중하게 고민하는 것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미국 대선에서도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논란은 있었다. 2008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은 해리 리드 당시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를 포함한 당 지도부가 힐러리 클린턴의 당선을 막기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인 점이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이미 예비후보자에 대한 등록이 시작됐고 선거일이 100일 남짓한 시점에도 선문답하듯 애매한 태도로 일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4년간 지방행정을 책임지려고 하는 사람이 아직 입지(立志) 작업조차 마무리하지 못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유시유종(有始有終)이라고 했나. 시작이 두루뭉술하니 퇴장도 그리 아름답지 못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워싱턴 특파원 시절 인터뷰했던 리 해밀턴 우드로윌슨센터 소장의 말이 기억난다. 34년간의 연방 하원의원 생활과 11년간의 소장직을 뒤로 하고 초야로 가는 시점의 고별 인터뷰였다. 왜 은퇴하느냐고 묻자 “어느 시점이 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다. 그러면 물러서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길을 가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이보다 솔직하고 분명한 답이 있을까? 우리 정치인들은 어떤가.

하태원 정치부 차장 triplets@donga.com
#심재철#새누리당#6·4지방선거#출마 선언#정갑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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