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정훈]김용판의 罪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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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훈 사회부장
김정훈 사회부장
2012년 12월 16일. 그날 밤 상황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대통령선거일을 사흘 앞둔 그날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가 전격 사퇴하면서, 오후 8시부터 시작된 3차 TV토론에서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짱 토론을 벌였다. TV토론이 끝난 뒤 기사 처리를 거의 마치고 한숨 돌리려 할 때였다. 서울지방경찰청 쪽에서 국가정보원 여직원 댓글 의혹 사건 수사 결과를 곧 발표할 거란 소식이 들어왔다.

오후 11시가 좀 안 돼 이 사건을 수사해온 서울 수서경찰서발로 보도자료가 배포됐다. 내용은 ‘서울지방경찰청 디지털증거분석팀의 분석 내용을 넘겨받은 결과 국정원 여직원이 비방 댓글을 단 사실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길게 잡으면 일주일쯤 걸릴 것 같다던 예상과 달리 일찍 결론이 난 것이었다. 정치권에선 한밤중 한바탕 공방이 또 벌어졌다. 새누리당은 즉각 문재인 후보를 향해 ‘조작극을 벌인 것을 사과하라’고 요구했고, 민주당은 ‘한밤중 기습 발표는 경찰의 선거개입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고 맹비난했다. 국정원 댓글 사건은 그만큼 대선 막판 가장 뜨거운 이슈였고, 이른바 ‘김용판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지난주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에게 무죄가 선고됐고, 108쪽에 이르는 판결문이 나왔다. 이보다 더 긴 판결문도 종종 있지만 이 정도면 꽤 긴 판결문이다. 재판부가 꽤나 고생했을 거란 짐작부터 들었다. 판결문은 당시 정황을 13가지로 나눈 뒤 이에 대한 각자의 주장을 곰곰이 짚어보는 식으로 작성돼 있다. 눈에 띄는 대목은 현재의 잣대로 과거를 재단하는 것을 최대한 피하고, 시시각각 바뀌어가던 상황에 맞춰 시뮬레이션을 하듯이 그때 당시의 잣대로 들여다보려는 분석 방식이었다.

김용판 사건에서 가장 궁금했던 대목은 당시 경찰이 왜 이런 발표를 했는가였다. 한밤중의 ‘서면’ 발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의 댓글들이 무수히 발견되면서 ‘허위 발표’를 한 게 돼 버렸고 대통령선거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판결문 말미에 ‘당시의 발표가 시기와 내용 면에서 최선의 것이었는지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라고 적었다. 이게 김 전 청장에게 형사책임을 물어 단죄할 일인지는 별론으로 치더라도 일처리가 잘못된 것만은 분명하다는 지적이다. 재판부의 아쉬움이 컸는지 판결문에는 ‘이랬으면 좋았을걸’ 하는 조언도 담겨 있다. ‘예컨대 국정원 여직원이 40개의 아이디와 닉네임을 사용한 사실이 (발표 당시) 확인된 이상 수사가 확대될 여지가 있다는 것을 밝히는 등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는 방법으로 업무를 처리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김 전 청장이 박근혜 후보에게 유리하도록 고의적으로 법을 어긴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 고쳐 맨 죄는 면키 어렵다는 얘기다.

이는 가벼이 넘어갈 수 없는 문제다. 선거 때마다 온갖 의혹을 제기하며 서로 고소 고발하면서 수사기관에 가부 판정을 요구하는 우리의 별난 선거문화 때문이다. 치고받는 폭로전 속에서 유권자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수사기관은 신속하게 진실을 가려줘야 하는 책무까지 떠안게 됐다. 더욱이 이런 수사결과가 대개는 한쪽에는 유리할 수 있고 다른 쪽에는 불리할 수 있는 것이기에 ‘고성능 폭탄 처리’ 수준의 정밀한 수사와 정확한 판단이 필요하다. 게다가 선거 이후 새 정부에서 ‘내 자리’ 걱정을 할 수밖에 없는 수사기관 책임자로서는 소신껏 사건을 처리하기 어려울 소지도 많다.

명예를 걸고 공소를 유지하겠다는 검찰의 항소로 재판은 또 열릴 테니 그건 그대로 지켜볼 일이지만 선거판 의혹사건을 앞으로도 계속 맞닥뜨려야 할 검찰과 경찰 등 수사기관에 주어진 과제는 여전히 무겁다.

김정훈 사회부장 jnghn@donga.com
#선거#국가정보원#댓글 의혹#김용판 사건#허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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