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19>환타 페트병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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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타 페트병
―이윤학(1965∼)

오전 내내 마룻바닥에 굴러
볕을 잘 쬔 1.5리터들이
우그러진
환타 페트병을 집어 든다.
피식 웃고 떠난 네 이름. 네 얼굴.
네 뒷모습 떠오르지 않는다.
정수기 꼭지에 대고 찬물을 채운다.
조금 남은 환타 빛 엷어진다.
어떻게 거기까지 들어갔는지
파리 한 마리
찬물 높이로 떠오른다.
파리가 날아간 뒤
환타 페트병
참았던 숨 울컥 토해놓는다.
장미 화분에 찬물을 주는 동안
환타 페트병 전신이 울렁거린다.

해가 머리꼭지 위에 있을 때야 화자는 부스스 잠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테다. ‘오전 내내 마룻바닥에 굴러/볕을 잘 쬔 1.5리터들이/우그러진 환타 페트병’, 그 안에 들었던 환타는 전날 밤에 ‘이름도 얼굴도 뒷모습도 떠오르지 않는’ 사람과 함께 화자가 마셨을 테다. ‘환타 오렌지’는 한때 ‘오란씨 파인’과 더불어 청량음료의 대명사였다. 가격이 저렴한 편인 데다 향긋하고 톡 쏘는 맛이 중독성이 있어 지금도 여름이면 찾는 사람이 많다. 혀와 목구멍에 짜릿하고 달콤한, 인공감미 청량음료와 같은 사랑의 뒷맛을 그린 시다.

기억에 남지도 않고 아쉽지도 않게 가버린, 사랑이라 이름 붙이기도 애매한 사랑. 상대 역시 마찬가지여서 ‘피식 웃고’ 떠났다. 쑥스러움과 가벼운 환멸이 개운치 않게 버무려진 건조한 웃음, ‘피식’. 화자는 빈 페트병에 정수기 물을 채운다. 사랑의 갈증을 채우듯이. ‘어떻게 거기까지 들어갔는지/파리 한 마리/찬물 높이로 떠오른다’. 파리는 허겁지겁 날아가고, 한숨 한 번 푹 쉰 뒤 화자는 장미 화분에 맑은 물을 부어준다. ‘환타 페트병 전신’이 화자 가슴인 듯 울렁거린다. 아, 정말이지 나는 장미꽃 같은 사랑을 꿈꾸네. 나를 정화시키고 고양시켜 줄, 싱싱한 장미 한 송이를 꿈꾸네. 내 사랑 장미여, 피어나렴! 청량음료 환타와 사랑의 ‘환타지’(판타지)의 대비가 절묘하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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