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 벽 앞의 20대 ‘나’ 아닌 ‘우리’ 문제에 입 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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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대자보 세대]<上>그들은 누구인가

전문가들은 20대의 대자보 릴레이를 일시적인 해프닝이 아닌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알리는 전조로 해석한다. 10일 서울 성균관대에서 열린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백일장.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전문가들은 20대의 대자보 릴레이를 일시적인 해프닝이 아닌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알리는 전조로 해석한다. 10일 서울 성균관대에서 열린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백일장.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10일 서울 성균관대에서는 ‘대자보 백일장’이 열렸다. 대자보 운동을 벌여 온 대학생 모임 ‘대학, 안녕들하십니까’가 사회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해 보자며 마련한 행사였다. 지난해 말 ‘안녕들하십니까’로 시작되는 대자보 릴레이를 촉발했던 주현우 고려대 경영학과 학생을 비롯한 이 모임 소속 학생들은 이달 중 대학 벽을 가득 메웠던 ‘안녕들’ 대자보를 책으로 엮어 낼 계획이다.

대학생들의 대자보 운동에 대해서는 검증되지 않은 정보를 감상적이고 선동적으로 공유한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하지만 대자보 열풍은 젊은 세대가 개인주의적이며 무기력하다는 통념을 뒤집는 사건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대자보 릴레이에 대해 일시적인 해프닝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 새로운 세대가 출현했음을 알리는 전조로 본다. 20대 초중반인 이들은 1960년대생들인 ‘386’ 세대의 자녀들이다. 이미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2002년 미선·효순 추모 촛불집회,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촛불세대’로 주목받은 바 있다. ‘우리’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고민하는 이들은 ‘나’의 문제에 빠져 소극적인 ‘88만원 세대’(20대 후반∼30대 초반)와는 다른 성향을 보인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안녕들’ 대자보 열풍을 일으킨 이들을 ‘88만원 세대’와는 구분되는 ‘신(新)대자보세대’라고 명명했다. 1990∼1995년 출생한 20대 초중반의 청년들로 부모 세대의 매체를 이용해 새로운 형식의 대자보 열풍을 일으킨 세대라는 뜻에서다.

이들이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신대자보세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세대에 속하는 대학생 200명을 대상으로 주관식 설문조사를 했다. 또 ‘안녕들’ 대자보 릴레이에 참여한 8명을 포함해 대학생 12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 386세대의 자식들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자주 사회문제 얘길 했어요.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이나 노동 문제 같은 이슈가 많았죠.”(이모 씨, 서울 H대 2학년)

1990년 이후 태어난 신대자보세대는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성장했다. 조기영어교육, 조기유학에 따른 기러기 아빠 붐은 이들의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일어난 현상이다. 이들의 부모는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386세대에 속한다.

본보의 설문조사에 참여한 신대자보세대 200명 중 67명은 자신의 정치 성향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로 부모를 꼽았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는 “미국의 경우 부모와 자식이 지지하는 정당이 같은 정당일체감이 있지만, 과거 한국은 또래 집단의 영향력이 높은 편이었다”며 “민주화 이후 한 세대를 집단적으로 정치화할 만한 이슈가 사라진 데다 386세대가 특히 정치화된 세대여서 자식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더 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청소년기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을 묻는 문항에서도 응답자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20명)이나 노 전 대통령의 서거(26명) 같은 부모 세대가 관심을 가졌던 이슈를 많이 언급했다. 특히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는 가장 많은 응답자(60명)가 꼽은 사건이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촛불시위의 주체는 당시 10대였던 386세대의 자녀였고 그들이 이제 20대가 됐다”면서 “10대 청소년기에 형성된 가치관이나 당시 사회적 발언을 했던 경험은 성인이 된 후에도 오랫동안 태도나 행동을 결정지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신대자보세대는 386세대의 판박이일까.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학과 교수는 “(현재의 20대는) 부모로부터 윤리·도덕적 가치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면서도 “일부는 부모와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등을 돌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젊은 층이 많이 이용하는 커뮤니티 사이트인 일간베스트에서 도덕주의적 태도에 대해 ‘X 선비질’이라고 조롱하는 것도 386식 도덕주의에 대한 비난”이라고 설명했다.

○ 자기계발의 ‘벽’을 보다

“성공요? 눈앞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 앞으로 훌륭한 뭔가가 되는 것보다는 취업을 위해 인턴으로 뽑히는 게 더 중요해요. 그런데 하나를 이루면 금세 ‘이게 다가 아니다’ 싶은 느낌이 들어요. 이런 게 계속 이어지니까 불안해요.”(정모 씨, 서울 H대 3학년)

신대자보세대를 이해하는 두 번째 키워드는 ‘자기계발’이다. 이들은 유년기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를 꼽았다(72명). ‘절약 포스터 그리기’ ‘금 모으기 운동’ 같은 단편적인 사건으로 IMF를 기억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아버지가 실직을 해서 이사를 갔다”고 회상하는 응답자도 있었다.

이 시기 확산된 ‘적자생존’ 논리는 이들의 의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외국어 실력과 국제적 감각을 필수조건으로 여기며 자랐고, 대학에 들어온 후에도 갈수록 좁아지는 취업문을 통과하기 위해 끊임없이 외국어 점수를 올리고 자격증을 따는 등 ‘스펙’을 쌓아 왔다. 전문가들은 이들이 1990년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자기계발서의 논리를 내면화해 자신을 관리하고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한다는 데 주목한다. 사회학자 오찬호 박사는 “한국사회가 저성장 사회로 변화하면서 조금이라도 못한 사람을 계속해서 배제해야 하는 시스템이 됐다. 자기계발에 대한 강조는 모든 성과와 실패의 원인을 개인의 노력으로 돌리며 이 같은 배제와 차별을 정당화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신대자보세대와 인터뷰에서는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강요받는 현실에 대한 ‘피로감’이 자주 표출됐다. 이들은 특히 ‘스펙을 위한 스펙 쌓기’에 몰두하는 상황에 대해 불만을 호소했다. 갈수록 ‘직업학교’가 되고 있는 대학환경을 비롯해 기업 자체에 대한 비판도 많았다.

“친구가 국토 대장정에 다녀왔어요. 이력서에 써야 한다고요. 자기소개서를 쓸 때도 진짜 취미나 특기를 쓰면 안 된대요. 하다못해 ‘찌개 끓이기’ 같은 것, 면접관이 관심 가질 만한 걸 써야 한 번이라도 더 물어본다고.”(모모 씨, 서울 K대 3학년)

“대학생 앰배서더, 서포터스 같은 것 좀 그만 만들면 좋겠어요. 서포트는 기업에서 알아서 하고, 아이디어가 필요하면 나한테 돈을 내고 사야지. 착취당하는 것 같아요.”(김모 씨, 서울 K대 2학년)

○ 내 문제 해결하려 연대를

이들은 인터뷰에서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 많지만 앞으로의 삶은 그만큼이 못될 것 같아 두렵다”고 했다. 설문조사에서도 67.5%가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면서도 68.5%는 ‘불안하다’고 답했다. 불안하다고 응답한 학생들은 그 이유로 ‘불확실한 미래’와 ‘취업’을 들었다.

“우리 세대가 부모 세대보다 못사는 최초의 세대라고 하잖아요. 부모님은 하루하루 세상이 좋아졌다고 하는데 이젠 그런 걸 기대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김모 씨, 서울 S대 4학년)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쓴 30대 논객 한윤형 씨는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명문대에 가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갈수록 삶이 내려가는 느낌이 서로의 안녕을 묻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지난 대자보 열풍의 근저에는 자기계발의 벽에 부닥친 이 세대가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결국 공동체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인식 전환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택광 교수는 “과거에는 ‘성공을 위한 OO가지 습관’ 같은 자기계발서가 유행했다가 나중엔 ‘무조건 믿으면 이뤄진다’는 ‘시크릿’ 같은 책이 인기를 끌었다. 요즘엔 그조차 안 통하니까 ‘힐링’이 유행한다”면서 “대자보 현상은 자기계발로는 현재의 한계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보이는 자조이자 성찰”이라고 말했다.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도 “계급상승의 실질적인 통로가 막힌 이들은 지금까지 ‘각자도생’을 꾀하는 방식으로 파편화돼 왔다. ‘안녕들’ 현상은 이들이 그와 정반대로 연대를 시작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구가인 comedy9@donga.com·박훈상·조동주 기자   
박우인 인턴기자 고려대 사학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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