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만 있으면서 뭘 알아?” 아내라서 엄마라서 더 아프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11일 03시 00분


코멘트

[말이 세상을 바꿉니다]<1부>나는 동네북이 아닙니다
‘엄마의 일기’ 속 엄마의 상처

《 “자식들 다 키워놓으니 만만한 게 엄마예요.” “애 아빠가 저를 부하 직원 다루듯이 해요.” 오늘도 엄마는 식구들이 무심코 던진 말에 멍이 든다. 엄마는 집안의 ‘동네북’인가. 취재팀은 50대 어머니 17명이 자녀와 남편, 시부모로부터 실제로 들었던 ‘가장 상처가 됐던 말’과 상황을 취합해 ‘엄마의 일기’를 재구성했다. 》  

또… 자다말고 숨이 막혔다

이른 새벽에 자다 말고 갑자기 가슴이 꽉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다. 벌떡 일어나 가슴께를 움켜쥐고 있는데 그대로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5분 정도 숨을 몰아쉬다 보니 좀 괜찮아졌다. 덩달아 깬 민재 아빠는 “왜 또 그래? 병원에서 아무 문제없다고 했다며”라고 했다. 세 번째 찾아간 병원 의사 선생님이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을 받아보라고 했던 건 말하지 않았다. 
멍든 마음, 몸으로 나타나

지난해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화병 임상진료지침’에 따르면 ‘화병’은 40, 50대 중년 여성에게서 주로 발병하며 환자들 중 46.4%가 소화기계통 질환, 33.3%가 근골격계 질환을 동반한다. 전문가들은 “막말에 상처받는 주부들의 경우 실제로 이러한 상처가 증상으로 나타나는 ‘신체화’를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반찬 없어도 많아도 타박

아침상에 앉은 민재 아빠가 또 한소리를 했다. 어제 보니 아침 찬거리가 없을 것 같아 시장에서 장을 봐왔다. 찌개도 끓여놓고 애들 먹으라고 고기도 볶아서 내놨더니 “아, 뭔 반찬이 쓸데없이 이렇게 많아?”라고 툭 내뱉었다. 아무것도 안 해놨으면 분명 “반찬이 이게 뭐야?”라고 했을 거다. 울화가 치밀었지만 출근길 기분 망칠까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순된 남편, 답답한 아내

남편과의 대화에서 대부분의 엄마들이 지적했던 ‘이중 구속’ 대화. ‘이중 구속’은 한 가지 상황에 대해 서로 모순되는 두 반응을 보여 상대를 응답할 수 없게 만드는 의사소통 방식을 의미한다. ‘남편의 말을 듣고 아내가 A라고 행동해도 비난받고, B라고 행동해도 비난받는다면 아내는 미칠 수밖에 없다.’(김병수, ‘사모님 우울증’ 중에서)  
“집에서 해준 게 뭔데?”

민재가 식탁에 앉았다. 오늘이 입사 면접 최종 발표일인데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눈치를 보다가 밥을 다 먹을 때쯤 “안 됐어?”라고 물어봤지만 대답이 없었다. “에구, 스터디인지 그런 거라도 좀 해 보지”라고 한마디했더니 “아, 그럼 엄마가 해봐!”라며 짜증을 냈다. “준우는 아버지가 대학교수고 엄마도 학원 원장인데, 난 집에 돈이 없어서 대학원도 못 가고!”  
애들한테 한다고 했는데…

주부 A 씨(52)는 “내색은 못했지만 ‘아들이 나를 이렇게 생각했나’하는 마음에 굉장히 큰 상처가 됐다. 도와주고 싶어서 인터넷으로 이것저것 찾아 알려줘도 ‘엄마가 뭘 알아’라는 말만 돌아왔다”고 말했다. 17명의 엄마 중 6명은 “자녀가 최소한 ‘부모 잘못 만나 나만 힘들다’ ‘해준 게 뭐가 있냐’는 식으로는 말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응답했다.  
“아, 이런 걸 누가 입어!”

둘째 민지가 고등학교에 가더니 부쩍 늦잠이 많아졌다. 벌떡 일어나 시계를 보더니 친구를 만난다며 밥도 안 먹고 옷부터 갈아입었다. 어제 동네 매장 행사에서 민지 입히면 예쁠 것 같아 코트를 하나 사왔다. 입어보라 했더니 “아, 이런 거 누가 입어!”라며 구석에 홱 밀쳐놓았다. “누구 만나는데?”라고 물었더니 “아 몰라, 말하면 엄마가 알아?” 하고 뛰쳐나가 버렸다.  
딸은 ‘칼바람’ 아들은 ‘태풍’

17명의 엄마 중 8명이 ‘일주일에 한 번은 아들딸의 말로 상처를 받는다’고 응답했다. 김병수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50대 어머니들을 상담하다 보면 딸은 ‘칼바람’ 같고 아들은 ‘태풍’ 같다. 따갑게 쏘아붙이든, 갑자기 소리를 치든 엄마에겐 쉽게 막말을 하는 게 자녀”라고 말했다.  
어머님 전화에 서러움만…

빨랫감을 나르고 있는데 집 전화기가 울렸다. ‘이것만 넣어놓고 받아야지’라는 생각으로 마지막 옷 뭉치까지 세탁기에 던져 넣고 달려갔다. 받자마자 핀잔이 날아왔다. “아니, 집에만 있는데 무슨 전화를 이렇게 안 받아?” 어머님이었다. “아뇨, 빨래 좀 챙기느라고….” 갑자기 서러움이 밀려왔다. 내가 집에서 노는 사람인가.  
며느리 무시하지 마세요

주부 B 씨(50)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서운하다 못해 짜증이 울컥 난다. 며느리를 마치 아무런 능력이 없어 집에 박혀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아 화가 난다”고 말했다. ‘시부모가 안 계신다’고 응답한 2명을 제외하고 15명의 엄마 중 4명이 “시부모의 무시하는 말에 상처받은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날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빨래와 집 청소를 해놓고 허리를 펴니 오후 4시. 남편 몰래 예약한 동네 정신건강의학과에 갔다. 인상이 좋은 의사가 맞았다. “무슨 말이 제일 힘드세요”라는 의사의 말에 “다들 내가 집에만 있다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해요”란 말이 튀어나왔다. 그 순간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홀로 병원 찾는 엄마들

주부 상담 경험이 많은 전문의들은 “정신건강의학과를 찾는 엄마들의 30∼40%는 혼자, 몰래 찾아온다”며 “엄마들 대부분은 다른 병원에서 상담 치료를 추천받아 오면서도 자신이 우울증이라는 소문이 나서 자식 혼사가 잘못될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TV 속 나랑 똑같은 그녀

오후 7시. 슬슬 저녁 차릴 시간이 됐다. 쌀을 씻으며 텔레비전을 틀어봤다. 일일연속극에선 나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또 다른 엄마가 저녁상을 차리고 있었다. 그녀는 밤이 돼 식구들이 잘 때까지 잠을 못 이루다 부엌에 나와 찬장에서 위스키 병을 꺼냈다. 어두운 식탁에서 혼자 홀짝홀짝 술을 들이켜는 그녀를 보니 왠지 내가 가서 위로해 주고 싶었다.  
주부 알코올의존증 증가세

‘키친 드링커’는 우울감을 해소하지 못해 혼자 키친(부엌)에서 술을 마시는 주부들을 일컫는 신조어다. 그만큼 주부 알코올의존증이 늘고 있다. 10일 알코올질환 전문병원인 다사랑병원에 따르면 입원한 전체 환자는 2010년 1322명에서 2011년 1160명, 2012년 1138명으로 해마다 줄어든 반면 50대 여성 환자는 2010년 55명에서 2011년 87명, 2012년 92명으로 꾸준히 늘었다.

곽도영 기자 now@donga.com
모진수 인턴기자 고려대 미디어학부 3학년
#엄마#상처#가족#아내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