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영식]‘No’라는 표현이 난무하는 외교 무대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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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국제부 차장
김영식 국제부 차장
“군인이 ‘No(아니다)’라고 말하면 No, ‘Yes(그렇다)’라고 하면 Yes다. ‘Maybe(아마)’라고 말하면 군인이 아니다. 외교관이 Yes라고 하면 Maybe, Maybe라고 하면 No다. No라고 하면 외교관이 아니다.”

외교가에서 자주 회자되는 경구다. 상대방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외교관의 어법을 설명한 말이다. 정상회의가 빈번해진 최근 국제 외교무대에선 ‘No’라는 말은 물론이고 그보다 더한 표현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지난해 말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참배한 뒤 주일 미국대사관은 ‘실망했다(disappointed)’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고위급 외교관인 해외 주재 중국 대사 40여 명은 아베 총리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국수주의라는 말이 쉽게 떠오르는 아베 총리의 일방적인 행보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지고 있다. 아베 총리의 움직임을 가볍게 볼 수는 없다. 동북아시아 국제질서의 급격한 변화라는 요인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는 ‘현상 유지의 틀’로 설명된다. 한국 중국 일본 모두가 원했던 방식도, 문서화된 것도 아니었지만 묵시적 합의로 지켜왔다. 현상 유지는 평화 상태를 이끌어 온 장치였다. 한중일 3국이 세계 경제를 이끄는 견인차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었고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6자회담을 개최하는 힘이 되기도 했다.

이런 틀은 2012년 일본이 센카쿠(尖閣)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를 국유화하고, 중국이 지난해 11월 동중국해 일대에 방공식별구역(ADIZ)을 일방적으로 설정하면서 깨질 위기에 처했다.

헨리 키신저 박사는 저서 ‘회복된 세계’에서 “고전적 의미에서의 외교, 즉 협상으로 차이점을 조정하는 행위는 ‘정통성’ 있는 국제질서에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그 성격이 묵시적 합의일지라도 동북아의 기존 질서는 국제적 합의에서 부여되는 정통성을 갖고 있다는 뜻으로 적용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틀을 깨는 새로운 규칙이 등장한 상황에선 전통적인 의미의 외교가 설 자리가 좁아진다. 그런 점에서 중-일 양국은 키신저 박사가 기존 질서를 깨뜨리는 세력이라는 의미로 규정한 ‘팽창적(acquisitive) 국가’에 해당한다.

팽창적 세력의 힘이 투사되는 동북아에서 현존 질서가 유지될지 변혁적 상황으로 바뀔지 예단하기는 힘들다. 분명한 것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이젠 쉽지 않다는 점이다. 아베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의 9일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마스조에 요이치(舛添要一) 전 후생노동상이 승리함으로써 아베 총리의 우경화 행보가 지속될 여지도 커졌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동북아의 난제를 풀기 위해선 어떤 작업이 필요할까.

나름대로 국내적 입지를 굳힌 아베 총리에 대해 감정적으로만 대하고 한일 관계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중국의 ‘호의’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식의 조급한 판단과 조치는 장기적인 한국 외교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질서의 시기엔 새 접근법이 필요한 법이다.

한중일 3국은 물론이고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 전략을 내세우는 미국을 참여시키는 새로운 4자 협의체를 제안해 보면 어떨까. 말하는 즉시 실무자들을 옥죄고, 국내정치를 더 중시하는 정상 간의 접촉 대신 ‘Yes’에 익숙한 외교관들이 새로운 틀을 만드는 ‘창조적 외교’가 절실한 시점이다. 안정적 국제질서를 유지할 정통성은 당사자끼리의 합의에서 나온다. 당장은 만남 자체가 불편하겠지만 물리적 충돌보다야 낫지 않겠나.

김영식 국제부 차장 spear@donga.com
#외교#어법#아베 신조#국제 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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