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을 ‘법난셔의 亂’ 표기… 대한제국 시대 ‘혁명’은 금기어였나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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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당시 단두대에서 처형된 직후의 루이 16세 모습. 고종 황제를 중심으로 권력 체제를 강화하려했던 대한제국의 상황에서 왕을 처형한 프랑스 혁명은 부정적으로 묘사될 수밖에 없었다. 동아일보DB
프랑스 혁명 당시 단두대에서 처형된 직후의 루이 16세 모습. 고종 황제를 중심으로 권력 체제를 강화하려했던 대한제국의 상황에서 왕을 처형한 프랑스 혁명은 부정적으로 묘사될 수밖에 없었다. 동아일보DB
근대서지학회 최신호에 실린 권순철 일본 사이타마대 교수(인문학부)의 논문 ‘대한제국에 프랑스 혁명이 어떻게 소개되었나’는 우리말로 번역된 서양사 책에서 프랑스 혁명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조사했다. 그런데 당시 책에서 ‘혁명’이라는 단어는 사실상 금기어였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1897년 출간된 ‘태서신사언해(泰西新史諺解)’가 대표적이다. 이 책은 영국인 로버트 매켄지의 저서 ‘19세기의 역사’(1880년)의 중국어 번역본인 ‘태서신사람요(泰西新史攬要)’를 우리말로 옮긴 것으로 영어 원서에 적힌 ‘프랑스 혁명(French Revolution)을 ‘법난셔(프랑스)의 난(亂)’으로 번역했다. 혁명을 부정적 의미가 강한 ‘난리’로 번역한 것.

1900년 황성신문에서 번역해 출간한 ‘법국혁신전사(法國革新戰史)’도 마찬가지. 이 책은 일본인 시부에 다모쓰가 쓴 ‘법국(프랑스)혁명전사(法國革命戰史)’를 우리말로 옮긴 책이다. 일본어 원서 제목의 ‘혁명’이 우리말 번역본에서는 아예 ‘혁신’으로 바뀌었고, 본문에서도 원서에 ‘혁명’이라 쓰인 부분을 부정적 의미가 담긴 ‘혁명의 난(亂)’으로 번역했다. 왕정을 끝내고 공화정을 수립한 대목을 설명할 때는 혁명을 옛 법을 새 법으로 바꿨다는 의미의 ‘변법(變法)’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혁명의 번역어로 부정적 측면이나 그 영향을 축소한 ‘난’이나 ‘혁신’, ‘변법’ 같은 단어를 택했던 이유는 뭘까? 권 교수는 “국왕의 죄를 물어 처형한 프랑스 혁명이 왕정이었던 대한제국 지식인들에게 충격이었을 것”이라며 “공화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 돌던 독립협회를 해산시키는 등 고종 황제를 중심으로 권력체제를 구축하려 했던 당시 시대상황의 영향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혁명이란 단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외교권을 뺏긴 이후였다. 권 교수는 “사실상 일제의 보호국 처지가 되면서 국권을 뺏긴 조선 왕조의 무능과 부패상에 대한 비판이 자유로워지면서 혁명이라는 단어도 당당하게 등장한다”고 설명했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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