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치올림픽 개막식, 문학-예술 어우러진 스토리텔링 압권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10일 03시 00분


코멘트

축제전문가 유경숙씨가 본 소치올림픽 개막식

소치 겨울올림픽 개막식 중 ‘축제’ 장면에 등장하는 러시아 민속 축제 마슬레니차. 러시아 전통 장난감 딤코보에서 모티브를 땄다. 소치 시내에선 딤코보 전시(아래쪽)가 열리고 있어 개막식과 부대 문화행사를 연계했다. 유경숙 소장 제공
소치 겨울올림픽 개막식 중 ‘축제’ 장면에 등장하는 러시아 민속 축제 마슬레니차. 러시아 전통 장난감 딤코보에서 모티브를 땄다. 소치 시내에선 딤코보 전시(아래쪽)가 열리고 있어 개막식과 부대 문화행사를 연계했다. 유경숙 소장 제공
유경숙 세계축제연구소장
유경숙 세계축제연구소장
‘공연 강국’ 러시아다웠다. 한국 시간 9일 새벽 소치 피시트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린 개막식은 지상에서 가장 거대한 공연장에서 펼쳐진 쇼를 보는 것 같았다.

테러에 대한 불안 때문에 신분 확인과 안전 검사를 위해 아홉 번이나 줄을 서고 입장해야 했던 짜증이 잊혀질 만큼 볼거리가 가득했다. 예닐곱 시간짜리 연극이 수시로 올라가고 일상에서 공연을 즐기는 나라답게 러시아 사람들은 그 기다림을 즐겼다.

개막식을 보기 위해 기차로 반나절을 달려왔다는 바르샤브스키 블라디슬라브라는 남성은 “러시아는 나라가 커서 이 정도 기다리는 건 어딜 가든 흔한 일이다. 그래서 항상 세미치키(러시아에서 주전부리로 먹는 해바라기 씨)를 준비한다”며 눈을 찡긋했다.

러시아어의 33개 알파벳에 각각 해당하는 세계적 거장의 이름들을 열거하며 개막식이 시작됐다.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나보코프, 푸시킨 같은 대문호부터 칸딘스키와 말레비치, 샤갈, 차이콥스키 같은 예술가와 디아길레프로 대표되는 러시아 발레, 그리고 ‘전함 포템킨’으로 영화사에 길이 남은 예이젠시테인까지…. 한때 미국과 더불어 세계 최강국이었다가 지금은 작아진 러시아가 “우린 원래 이런 나라야” 하며 으쓱하는 듯했다.

내 옆에서 러시아 국가를 목청껏 따라 부르던 예카테리나 카차라는 여성은 “이게 바로 러시아”라며 연신 “샤갈 그림 봤어? 러시아 발레 봤어? 톨스토이 읽었어? 그게 다 러시아야!” 라고 자랑스레 말했다.

개막식은 ‘전쟁과 평화’ 같은 문학을 비롯해 음악, 문학, 미술, 무용 등 러시아의 자랑인 고전 콘텐츠를 개막식 스토리의 뼈대로 삼고 이를 현대적 감각으로 무대화한 점이 돋보였다.

‘사랑’을 의미하는 류보프 소녀의 등장은, 마치 샤갈의 그림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몽환적 분위기로 연출됐다. 러시아 혁명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붉은 공중 모형들은 차갑고 추상적이지만 강렬한 색채와 이미지 때문인지 움직이는 칸딘스키 회화를 보는 것 같았다.

영화 ‘러브 오브 시베리아’에 나오는 듯한 수백 명의 장교가 절도 있는 군무를 펼치다가 순식간에 ‘전쟁과 평화’의 고급 무도회장으로 입체적 장면 전환이 되는 순간은 연출력이 가장 돋보였던 대목이었다. 그 장면은 첨단 영상 그래픽의 힘이 컸는데 상공에서 영상을 쏴 일종의 착시효과를 만들어냈다. 무대 바닥 여기저기서 높은 기둥이 거짓말처럼 솟아오르는 장면은 그 자체가 완성도 높은 입체 공연이었다.

3시간 가까이 총 18개 장면으로 구성된 개막식은 러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다룬 다큐멘터리 한 편을 본 것 같은 만족을 안겨줬다. ‘스토리 발굴’ 스트레스에 빠져 있는 한국에도 좋은 본보기가 될 만큼 이야기 구조가 안정적이었다. 소치 올림픽 개막식은 ‘스토리도 중요하지만 스토리를 어떻게 전달하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명쾌하게 보여준 ‘최고의 스토리텔링 개막식’이라 할 만했다.

소치의 또 다른 특징은 개막식과 부대 행사의 유기적 연결이었다. 쉽게 말해 개막식은 압축된 목차고 각 부대 행사와 문화프로그램은 설명서와 같은 역할을 한다. 소치 시내 공연장과 박물관 12곳에서 미술, 콘서트, 발레, 연극, 오페라 등 다양한 주제의 문화행사가 펼쳐지는데 이런 공연을 보면 퍼즐을 맞추듯 개막식에 등장한 러시아의 문화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개막식 중 슬라브족 최대의 민속 축제인 마슬레니차를 재현한 대목에 등장하는 알록달록한 소품과 인형은 러시아의 전통 장난감 딤코보(Dymkovo)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인데, 시내에선 올림픽에 맞춰 딤코보 전시도 함께 열리고 있다.

개막식에서 오륜기가 ‘사륜기’가 되어버린 실수가 있긴 했지만 ‘역대 가장 화려한 개막식’이라는 평가와 함께 러시아의 건재를 과시한 축제의 장이었다.

유경숙 세계축제연구소장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