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억 사기대출에도 깜깜… 금융사 내부경보등 꺼졌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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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단 대형 금융사고 왜?

3000억여 원 규모의 사기 대출, 1억 건이 넘는 개인정보 유출 등 잇따라 터지는 초대형 금융범죄들은 금융회사의 부실한 내부통제가 원인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최근 계속되는 금융범죄에 대해 “금융사들이 허술한 업무처리를 방치하는 경향이 있다”며 이런 관행이 금융범죄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한다.

대출 서류를 위조하고 고객정보를 수천만 건씩 빼내는 ‘간 큰’ 범죄가 벌어지는 데도 금융사들은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수년간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런 허술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내부자나 전문 사기꾼이 ‘나쁜’ 마음을 먹고 덤비면 무방비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게 한국 금융의 현실이다.

○ 내부범죄 경보시스템 작동 멈춘 금융회사


지난해부터 부쩍 많아진 대형 금융범죄들의 발생 과정을 추적해보면 ‘내부 경보장치’가 작동하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작년 1월 NH농협은행에서 터진 1300억 원 파생상품 거래조작 사건이 시발점이었다. 농협은행 파생상품 딜러 A 씨는 실적을 부풀리기 위해 2010∼2012년 거래 가격을 조작하고 가짜 거래 명세를 만드는 식으로 손익을 조작했다. A씨의 거래를 수상히 여긴 팀장이 장부를 들춰보기 전까지 2년여간 거래 조작을 눈치챈 은행 내부자는 없었다.

지난해 11월 KB국민은행의 국민주택채권 위조사건 역시 2년 넘게 내부 경보음이 제대로 울리지 않았다. 은행 감찰반 직원은 집에서 컬러프린터를 이용해 채권을 위조하고 있는 사실을 눈감아줬고 창구 직원은 채권이 위조된 사실을 알면서도 현금으로 바꿔준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들어 발생한 신용카드 개인정보 유출사고와 KT 자회사인 KT ENS 직원-협력업체 공모 사기대출의 경우 검찰과 금융감독원이 적발하기 전까지 해당 금융사는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스마트폰 프로그램 개발업체인 H소프트가 1300여 명의 고객 계좌에서 자동이체로 1만9800원씩 빼가려던 사건은 피해자들이 해당 금융사와 금융결제원에 신고하기 전까지 누구도 이런 일이 벌어진 사실을 몰랐다.

○ 금융사, 허술함을 신뢰로 착각

내부 경보장치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금융사 내부통제와 위험관리가 그만큼 허술하다는 증거다. 이재연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원리원칙대로 이뤄져야 할 내부통제가 ‘이제껏 별 문제 없지 않았느냐’는 식의 관행 때문에 무력화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민은행 채권위조 사건의 경우 ‘실물 채권의 현금 교환 요구가 들어오면 꼼꼼히 확인한다’는 당연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 은행 측에서는 사건을 저지른 직원이 평소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회사 내 평판이 좋아 의심을 갖기 힘들었을 거라는 ‘변명성 해명’이 나오기도 했다.

KT ENS 직원-협력업체 사기대출은 ‘KT 자회사 인감이 찍혔는데 문제가 있겠느냐’는 근거 없는 믿음이 화를 불렀다. 사기대출에 가담한 KT ENS의 직원은 영업부장이었다. 대출을 해준 은행은 이 회사의 자금 담당자에게 전화 한 통을 거는 기본적인 업무를 소홀히 했다. 개인정보 유출도 외주 용역업체 직원이 개발 프로그램을 시험 작동한다고 했을 때, 고객의 진짜 개인정보가 아닌 원칙대로 테스트용 ‘모의 데이터’를 제공했으면 이런 사태는 미리 막을 수 있었다는 게 보안 전문가들의 견해다.

○ 원칙 준수 관행 세워야

최근 잇따라 터지는 대형 금융사고는 한국 금융체계에 그만큼 허점이 많다는 것을 뜻한다. 공과금 자동이체를 할 때 본인 확인이 허술하다는 점, 대기업이 발행하는 대출 서류는 별다른 의심 없이 은행에서 ‘OK’ 사인이 이뤄진다는 점 등이 최근 사고를 통해 드러났다.

전문가들은 금융의 필수인 ‘더블 체크(재확인)’ 원칙을 바로 세우기 위한 금융권의 노력이 절실하다고 지적한다. 윤석헌 숭실대 교수(경제학)는 “해외 금융사기와 비교하면 범죄의 수준이 낮다”며 “이는 한국 금융이 초보적 내부 범죄도 스스로 걸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윤 교수는 “개인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말고 금융권 전체가 위험을 상시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차근차근 갖춰야 한다”고 덧붙였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위험관리, 보안을 가욋일로 취급하는 금융사의 관행을 바로잡기 위한 제도 개선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상훈 기자 january@donga.com
#사기대출#금융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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