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기록벽 선비, 鮮末 지배층 타락상 까발리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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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저실기/심노숭 지음/안대회 김보성 외 옮김/764쪽·3만2000원·휴머니스트
영-정조 시대 뒷얘기 시시콜콜… 자신 치부마저 거침없이 묘사

입신양명엔 실패했지만 남다른 기록벽을 지녔던 심노숭이 쓴 ‘자저실기’는 루소와 키르케고르의 고백록에 필적할 만큼 숨김없이 자기 자신을 그려 내는 근대적 자아관을 보여 준다. 동시에 조선 영·정조 시대 지배 엘리트층의 타락상을 포착했다는 점에서 근대적 리얼리즘의 선취라 할 만하다. 그림은 19세기 조선화가 유숙이 그린 ‘수계도권’. 휴머니스트 제공
입신양명엔 실패했지만 남다른 기록벽을 지녔던 심노숭이 쓴 ‘자저실기’는 루소와 키르케고르의 고백록에 필적할 만큼 숨김없이 자기 자신을 그려 내는 근대적 자아관을 보여 준다. 동시에 조선 영·정조 시대 지배 엘리트층의 타락상을 포착했다는 점에서 근대적 리얼리즘의 선취라 할 만하다. 그림은 19세기 조선화가 유숙이 그린 ‘수계도권’. 휴머니스트 제공
나는 누구인가? 이는 매우 근대적 질문이다. 심리적 거울에 비친 자아에 대한 성찰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탄생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근대가 되면서 자연환경에 대해 어느 정도 통제력을 확보하면서 절대적 존재인 신에게 의지하기보다는 개별적 존재인 자아를 응시할 여유를 갖게 돼서다. 여기서 ‘있는 그대로’를 중시하는 근대 미학으로서 리얼리즘이 탄생한다.

이를 한국의 전근대 사회인 조선에 적용해 보자. 조선시대 문인들에게 뚜렷한 자의식은 금기의 대상이었다. 스스로 자신의 초상을 그리고 그에 대해 글을 짓는 자화자찬(自畵自讚)이 조롱의 대상이 된 것을 떠올려 보라. 이에 반기를 들었던 김시습과 허균 같은 이들이 조선의 대표적 이단아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한국 근대의 맹아기로 불리는 영정조 시대가 오면 강렬한 자의식을 드러내는 이가 많아진다. 최근에 주목받는 효전 심노숭(1762∼1837)도 그런 인물 중 하나다.

효전은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의 7대 종손이다. 부친은 정조 때 노론 시파의 핵심인사였던 심낙수다. 명문세가 출신이지만 불혹을 넘겨서까지 대과 급제에 실패했다. 마흔둘에 음서로 벼슬길에 들었지만 주로 지방관으로 전전했다.

그런 그에겐 남다른 장점이 있었다. ‘글짓기 병’이라 칭한 기록벽이다. 38책에 이르는 그의 문집 ‘효전산고(孝田散稿)’는 자신이 지은 시문(詩文)뿐 아니라 당대 시대상에 대한 기록이 가득하다. 특히 33책과 34책에 해당하는 ‘자저실기(自著實記)’는 그 자신에 대한 냉철한 묘사와 당대를 풍미한 정객들에 대한 일화가 빼곡히 기록돼 있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가 박사급연구원 13명과 함께 번역한 이 책을 읽다 보면 근대적 자아와 리얼리즘의 개화를 목도하게 된다. 효전이 68세에 쓴 자저실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터럭 하나라도 똑같지 않으면 사람의 본모습과 다르다.”

“나는 어려서부터 초상화를 좋아해 화공만 만나면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졸라 댔다. 몇 명의 화가를 거쳐 수십 본을 바꾸어 그렸으나 하나도 닮은 것이 없어서 제풀에 지쳐 포기하고 말았다. 그림으로 그려 낼 수 없다면 글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글이라면 굳이 남의 손을 빌릴 필요 없이 차라리 내가 직접 써서 후세 사람에게 신뢰를 주는 것이 낫다.”

그리고 자신의 외모를 이렇게 묘사한다. “키는 보통사람보다 훨씬 작다. 등은 구부정하고 불룩 솟았고 배는 펑퍼짐하게 아래로 처졌다.” 이런 객관성은 자신의 내면에도 적용된다. “정욕이 남보다 지나친 면이 있다. 열네다섯 살부터 서른대여섯 살까지 거의 미칠 듯 방종해 하마터면 패가망신할 지경이었다”며 “기생들과 놀 때 좁은 골목이나 개구멍도 가리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이는 매우 당황스러운 고백이다. 효전은 젊은 날에 병사한 아내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숨김없이 고백한 글로 조선의 로맨티스트로 알려져 왔기 때문이다. 효전이 아내와 사별한 나이가 서른이었으니 결혼생활 내내 광적으로 기생집을 출입한 셈이다.

자신의 이중성에 대한 이런 비판의식은 외부로 향할 때 더욱 매서워진다. 특히 정조 치세를 풍미했던 정객들의 일화를 보면 환멸감이 들 정도다. 십년세도의 주역 홍국영은 인사문제를 보고하러 집으로 찾아온 이조참판을 문밖에 세워두고 기생과 분탕질을 쳤고 나이나 직급이 높은 이들에게도 하대를 하며 뇌물을 밝혔다. 노론 벽파의 거두였던 김종수는 한때 동지였던 홍국영의 정치생명을 끝장내기 하루 전 홍국영의 집을 찾아가 종일 환담을 나눌 정도로 ‘두 얼굴의 사나이’였다. 효전이 노론 시파였기 때문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긴 힘들다. 하지만 정승이던 노론 민지원과 소론 이광좌, 남인 채제공이 당파가 다른 사람과 좌정할 때 병풍을 쳤다는 증언을 보노라면 부아가 치밀 정도다.

당파 싸움의 폐해를 강조하는 대목이 드문드문 보인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이중성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력이 자신의 당파에는 이르지 못한 채 꺾이고 만다. 이 책이 불완전한 근대인의 초상이 된 이유다. 하지만 이를 시대적 한계라 비판할 수 있을까? 21세기 한국에도 이념과 정파가 다르면 서로를 사갈시하는 이들로 넘쳐 나지 않던가.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조선시대#영정조#효전 심노숭#자저실기#효전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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