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1894 갑오년 vs 2014 갑오년’ 닮은 점과 다른 점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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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년만에 다시… 한반도, 동북아 격랑의 중심에 서다


동학농민운동과 청일(淸日)전쟁, 갑오개혁이 있었던 1894년 갑오(甲午)년. 조선이 신흥세력 제국주의 일본에 강제 편입되면서 결국은 망국으로 이어졌던 그해가 120년 후인 2014년과 닮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장면 1#


1894년 5월 31일.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 입성했다. 전봉준은 전라감사 집무실인 선화당을 손쉽게 접수했다.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신 전주가 무너지자 조선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긴급 대신회의를 연 끝에 고종은 6월 2일 청에 공식 파병을 요청한다. 10년 전 맺은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도 출병한다. 청일전쟁의 인계철선이 당겨지는 순간이다.

당시 메이지(明治) 유신을 거쳐 근대화한 일본은 대륙으로 뻗어나가려 했다. 동아시아 패권추구를 주창하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도 이런 분위기에서 나왔다. 일본은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한편 군제 개편과 군비확충에 전력을 다했다. 이종호 건양대 교수(군사학)에 따르면 일본은 1881년부터 1890년까지 10년 동안 매년 세출대비 군사비를 20∼30% 이상 배정했을 정도다. 일본 육군참모본부도 1887년에 이미 ‘청국정도책안(대청 전쟁계획)’을 만들어 놓았다.

조선에 혼성여단 7000명을 파견한 일본군은 철병요구를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피하다 급기야 7월 23일 조선 왕궁인 경복궁을 점령했다. 대원군을 앞세워 친일내각을 세워놓고는 청과 무력충돌을 한다. 25일 충남 아산 풍도 앞바다에서 청 해군을 공격하고 29일에는 성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그러고는 8월 1일 청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한다. 10여 년간 내실을 다져온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다.
#장면 2#

2014년 갑오년 1월 31일(설날). 중국 수호이 30 전투기 2대는 실탄을 장착한 채 동중국해 방공식별구역(ADIZ)에 들어온 일본군 전투기를 힘으로 몰아냈다. 지난해 11월 일본과 겹치는 ADIZ를 선포한 데 이어 본격적인 실력행사에 들어간 것이다. 이 ADIZ 내에 제주도 남쪽 이어도까지 포함돼 한국도 자극하고 있다.

이제 중국은 그동안 도광양회(韜光養晦·재능을 감추고 때를 기다린다)를 벗어던졌다. 공공연하게 대국굴기(大國堀起)를 외치고 있다. 경제 규모가 일본보다 커진 자신감을 바탕으로 120년 전 청일전쟁에서 빼앗긴 센카쿠(尖閣)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를 되찾겠다며 기세등등하다. 군비확장에도 힘써 지난해 달에 우주선을 쏘아 올렸고 머지않아 차세대 스텔스기도 양산한다. 경(輕)항공모함을 비롯해 일본이 갖지 못한 전략핵잠수함도 5척이나 운용하는 등 해군력에서 일본을 능가하고 있다. 이에 맞서 일본은 우경화로 달려가며 ‘보통국가’를 넘어 강한 일본을 외치고 있다.

120년의 시차를 두고 동북아시아에서 벌어지는 두 장면이다. 그때와 지금의 중국과 일본의 충돌 양상이 닮았으며, 강대국의 틈새에 낀 한국의 모습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120년 전 조선은 힘이 없었다. ‘나라를 지켜 달라’며 타국에 원병을 청하고 어쩔 수 없이 전쟁터로 땅을 내줄 정도였다. 당시 조선은 인구(1500만 명 추산)를 먹여 살리기도 벅찼으며 이렇다할 군사력도 없었다. 인구 3억9000만 명 정도의 대국 중국도 아편전쟁에 패하며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양무(洋務)운동을 펼쳤으나 한계가 있었다.

청일전쟁의 승리를 선전하기 위해 일본이 제작한 원색 판화첩 ‘우키요에'의 한 장면. ‘조선경성 오토리공사대원군 호위’라는 제목. 동학농민군 진압을 구실로 파견된 일본군이 오토리 게이스케 공사의 지휘 아래 흥선대원군을 앞세우고 경복궁에 불법 난입하는 장면이다. 천안박물관 제공
청일전쟁의 승리를 선전하기 위해 일본이 제작한 원색 판화첩 ‘우키요에'의 한 장면. ‘조선경성 오토리공사대원군 호위’라는 제목. 동학농민군 진압을 구실로 파견된 일본군이 오토리 게이스케 공사의 지휘 아래 흥선대원군을 앞세우고 경복궁에 불법 난입하는 장면이다. 천안박물관 제공
반면 일본은 열도 남단 조슈(長州)번 등 존왕양이 세력이 메이지 유신의 주체세력으로 등장하며 근대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였다. 인구는 4100만 명. 조슈번은 당시 정한론과 팽창주의의 총본산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총리 등을 배출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때 총리인 가쓰라 다로(桂太郞)와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도 이곳 출신. 아베 신조(安倍晋三) 현 총리도 조슈번의 현재 이름인 야마구치(山口) 현 출신이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이긴 뒤 대동아공영론을 주창하며 전쟁의 길로 달려가다 결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해 몰락한다.

한국의 역량은 여러 면에서 그때와는 다르다. 중국과 일본의 몸집은 여전히 크다. 중국은 세계 두 번째 경제대국으로 미국과 함께 G2라 불린다. 일본은 3위로 내려앉았지만 독일과 프랑스의 국내총생산(GDP)을 합친 것과 비슷한 규모의 대국.

하지만 한국의 경제규모도 세계 10위권 중반이다. 영국의 싱크탱크 경영연구센터(CEBR)는 “15년 뒤에는 한국이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호주를 밀어내고 11위로 뛰어오를 것”이라고 지난해 12월 말 내다봤다. 또 버리는 음식이 문제가 될 정도로 풍족하고, 정보기술(IT)의 강국이기도 하다.

이런 경제적 요인 외에도 한국은 민주화 개방화된 나라에 속한다. 돈으로 따질 수 없는 무형의 힘이다. 소설가 복거일 씨는 “120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개방돼 있다. 우리는 자유무역을 바탕으로 시장친화적으로 발전해왔다. 개방은 역사의 대세”라고 말했다.

군사력에서도 한국은 양국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최소한의 억지력을 갖추기 위해 예산을 늘리고 있다. 이지스함을 3척에서 6척으로 늘리고 3000t급 잠수함 9척을 2020년까지 배치키로 한 것은 이 같은 노력의 일환이다.

하지만 국제정세가 그때와 닮았다는 점은 걱정거리다. 일본과 중국의 충돌 양상은 비슷하지만 후원국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본질적으로는 중국의 팽창하려는 대국 굴기와 이를 막으려는 미국의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가 큰 틀에서 맞부딪치는 형국. 그러나 120년 전의 국가 관계가 단선적이라면 지금은 훨씬 복잡다기하다. 미국과 중국은 전략적 이해가 다르더라도 금융과 에너지, 환경 등 협력해야 할 분야가 많다. 미국으로서는 일본의 우경화가 궤도를 벗어나면 제지할 가능성이 높다.

한반도를 ‘대륙을 향한 방아쇠’나 ‘해양을 향한 창끝’으로 보는 각축적 패러다임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전문가들은 지금은 한국이 움직일 공간이 많다고 보고 있다. 김경민 한양대 정치학과 교수는 “한국이 수동적 자세에서 벗어나 한중일 원자력협력, 핵안보협정, 녹색성장 등 비군사적인 면부터 적극적으로 풀어 가면 답이 있다”고 말했다. 동북아균형자론 등 거대 담론보다는 한국이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

하영선 동아시아연구원 이사장(서울대 명예교수)은 “현재 동북아가 각축의 모습을 보이고는 있지만 대결을 피하려는 힘도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며 “120년 전 한반도와 그 주변은 닮았지만 다른 측면이 많다”고 말했다. 다만 “그때와 오늘을 비교하는 논의가 현재 비생산적인 정치행태와 사회 양극화를 경고하는 것이라면 의미가 있다”고 여운을 뒀다.

윤양섭 전문기자 lailai@donga.com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동북아#한반도#갑오년#한국#중국#일본#갑오개혁#동학농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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