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케치]프랑스 국민 54% “영부인 공식역할-정부지원 없애자” 왜?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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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랑드 스캔들에 ‘엘리제궁 여인들’ 속살 드러났다


“엘리제궁에서 얼마나 많은 배신과 음모가 판치는지 모를 거다. 권력의 중심에서 벗어나 해방감을 느낀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의 전(前) 동거녀 발레리 트리에르바일레르가 최근 올랑드와의 결별 직후 한 말이다.

파리 8구의 포부르 생토노레가(街) 55번지에 있는 프랑스 대통령 관저 엘리제궁은 대통령 주변의 여성들이 안주인으로 입성하기 바랐던 곳. 그런데 이곳을 거친 몇몇 영부인(대통령 부인)들은 트리에르바일레르처럼 엘리제궁의 음습한 이면에 몸서리를 친다.

상당수 프랑스 영부인들은 여론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누려왔다. 각종 스캔들을 몰고 다니며 대통령인 남편보다 더한 유명인사로 뜨기도 하고, 자유연애와 결별로 세상을 놀라게도 했다. 물론 미국의 힐러리 클린턴, 미셸 오바마처럼 내조에 충실했던 영부인들이 엘리제궁 안방을 차지하던 때도 있었다. 엘리제궁에 살았던 여인들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조롱의 대상이 된 엘리제궁의 사생활

지난달 올랑드 대통령이 트리에르바일레르와 결별을 선언하기 전 그는 엘리제궁 생활에 미련을 두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대통령 부인 역할을 시켜주면 올랑드를 용서하겠다’는 태도가 그랬다. 사실 프랑스 국민들도 역대 대통령과 영부인의 사생활에 관대한 입장을 보여 왔다.

그런데 요즘 여배우 쥘리 가예와의 염문설이 불거진 올랑드 대통령에 대해선 정색하며 비판하고 있다. 역대 대통령의 사생활을 두둔해왔던 프랑스 일간 르몽드는 “대통령에겐 사생활이란 없다”며 올랑드를 여론의 도마에 올려놓았다. 르몽드는 “올랑드 대통령이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이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처럼 일탈 행위나 두 집 살림을 해도 미디어가 침묵으로 보호해주던 절대 권력의 시대에 살고 있는 줄 착각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역대 프랑스 대통령의 여성 편력을 보면 올랑드에 대해서만 가혹한 듯 보이기도 한다. 펠릭스 포르 전 대통령은 28세 연하의 정부와 밀회를 즐기다 복상사(腹上死)했다. 올랑드의 전임자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은 친구의 부인과 바람을 피워 두 번째 아내로 삼았다.

엘리제궁을 거쳐 갔던 몇몇 영부인도 남편에 버금갈 정도로 화려한 남성 편력을 자랑한다. 사르코지의 세 번째 부인 카를라 브루니가 대표적이다. 브루니는 모델로 활동하던 젊은 시절 가수 믹 재거와 에릭 클랩턴, 영화감독 레오 카락스, 현 프랑스 외교장관 로랑 파비위스 등과 수상한 밀회를 이어가는 등 염문을 뿌렸다.

브루니는 또 프랑스 유명 철학자이자 약 30세 연상인 장폴 앙토방과 만나던 중 유부남인 그의 아들 라파엘 앙토방과 사랑에 빠져 아들을 낳았다.

프랑스를 발칵 뒤집은 이 사건 때문에 브루니가 사르코지와 결혼할 때 “아무리 사생활이라 해도 아버지와 아들을 모두 사귀어 혼외자까지 낳은 대통령 부인은 적절치 않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르몽드는 최근 올랑드를 겨냥해 “대통령은 여가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배우자와의 관계를 어떤 이미지로 노출시켜야 할지에 관한 고민을 포함해 철저한 사생활 관리가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이 문제에 관해 오십보백보 격인 사르코지 전 대통령도 “나와 브루니는 아침이나 일몰 후 비열하게 보일 수 있는 사진을 찍히기 싫어 우리 관계를 빨리 공식화했다”며 “대통령은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일을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생활은 자유지만 대통령으로서의 직업의식은 지키라는 충고다.
“영부인이라 부르지 마”

2012년 엘리제궁에 입성한 트리에르바일레르는 정식 부인이 아닌 동거녀 자격의 대통령 부인, 직업을 가진 대통령 부인이라는 두 가지 최초 기록을 갖고 있었다. 기자인 그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세 자식을 부양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하지만 올랑드나 국가의 돈으로 살고 싶지 않다”며 주체적인 삶을 강조해왔다.

그의 전임자들 중 대통령 부인의 삶과 엘리제궁 생활을 처음부터 싫어했던 인물들도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부인 다니엘,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대통령의 부인 안에몬,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전 부인 세실리아가 그런 부류다. 다니엘과 안에몬은 엘리제궁에 입성하지 않고 사저에 거주하면서 의전상 자신이 필요할 때만 남편과 동행하는 식으로 부부 관계를 유지했다.

프랑스 역대 대통령 부인 중 최고의 행동파 지식인으로 평가받는 다니엘 미테랑은 자신을 ‘프르미에르 담(Premiere Dame)’이라고 부르지도 못하게 했다. 이는 영어 퍼스트레이디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단어. 다니엘은 17세 때부터 나치 독일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고 쿠르드족 등 세계 각국의 핍박받는 소수민족들을 돌봤다. 대통령 부인보다 남편의 정치적 동지 및 비판자에 가까웠다. 그는 1996년 미테랑 대통령의 장례식에 남편의 혼외자 마자린 팽조를 초청하는 관용도 보였다.

2007년 10월 사르코지의 대선 승리 5개월 만에 그와 결별한 세실리아는 프랑스 대통령 부인 중 최초로 남편의 재임 중 이혼하는 기록을 세웠다. 다섯 달이라는 짧은 엘리제궁 생활 동안 영부인의 역할도 수행하지 않았다. “몸이 안 좋다”며 세계 최고의 권력자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만찬에 불참했고 자녀 생일을 이유로 외국 순방 중 남편을 두고 먼저 귀국했다. 그는 이혼 직후 이벤트 기획자 리샤르 아티아스와 재혼했다.

향락과 내조 사이에서

프랑스 파리 8구에 있는 대통령 관저 엘리제궁. 루이 15세의 정부인 퐁파두르 후작부인의 거처였던 이곳은 19세기 초 나폴레옹 1세 때부터 통치자를 위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1959년 샤를 드골 대통령의 집권 이후 강력한 대통령제가 실시되면서 명실상부한 프랑스 정치 1번지가 됐다. 동아일보DB
프랑스 파리 8구에 있는 대통령 관저 엘리제궁. 루이 15세의 정부인 퐁파두르 후작부인의 거처였던 이곳은 19세기 초 나폴레옹 1세 때부터 통치자를 위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1959년 샤를 드골 대통령의 집권 이후 강력한 대통령제가 실시되면서 명실상부한 프랑스 정치 1번지가 됐다. 동아일보DB
스캔들 메이커로 유명했던 대통령 부인들은 남편보다 더한 유명세를 떨쳤다. 화려한 패션으로 유명했던 클로드 퐁피두는 세네갈의 초대 대통령 레오폴 상고르, 유명 배우 알랭 들롱의 경호원이던 세르비아 출신의 스테반 마르코비치 등과의 스캔들에 시달렸다. 당초 상고르와 연인이었던 클로드는 그의 친구인 조르주 퐁피두를 만난 직후 그와 결혼했다.

1962년 샤를 드골 대통령이 조르주 퐁피두를 총리로 임명하며 사실상 후계자로 낙점했을 때 검소한 생활로 유명했던 영부인 이본은 클로드를 불러 “지나친 향락을 자제하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클로드는 각종 파티와 연회를 즐겼고 마르코비치와의 스캔들에 연루됐다.

반면 내조에 충실했던 대통령 부인도 많았다. 이본은 남편의 권력을 이용하기 위해 부나방처럼 몰려드는 사람들을 엄격히 차단해 ‘엘리제궁의 검열관’으로 불렸다. 이본은 남편 사후 영부인에게 지급되는 연금을 받지 않았다. 드골 서거 당시 국립묘지 팡테옹에 안장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지만 “그의 유언은 가족장”이라며 이 역시 물리쳤다.

드골의 묘소가 있는 그의 고향 ‘콜롱베레되제글리즈’는 파리에서 약 250km 떨어진 두메 산골. 이곳에 있는 드골 기념관도 연금이 없어 곤궁한 삶을 살던 이본이 집을 팔려고 하자 한 사업가가 이를 인수해 드골을 기리는 장소로 만들었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의 부인 베르나데트는 여성편력이 심한 남편 곁에서 묵묵히 그를 보조해 ‘엘리제궁의 거북이’라 불렸다. 프랑스의 유명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 위의 대학’으로 불리는 그랑제콜 파리정치학교를 졸업한 엘리트에다 남다른 미모까지 갖췄다. 하지만 평생 남편의 운전기사에게 “오늘 내 남편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는 굴욕적인 질문을 하면서 살아야 했다. 30년 넘게 거식증과 우울증을 앓은 큰딸을 돌보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영부인 무용론 급부상

올랑드 스캔들에 질린 프랑스에서는 ‘영부인 무용론’이 흘러나온다. 각종 공식행사에서 국격을 높이는 역할을 맡아야 할 영부인의 위상이 연이은 대통령들의 외도로 추락하는 데다 한국 독일 등 세계 각국에서 여성 최고지도자가 탄생하는 상황에서 굳이 고루한 영부인 개념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여론이다. 베르나데트 시라크 여사도 최근 인터뷰에서 “영부인은 우스꽝스러운 발상”이라며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다.

경제 상황이 나쁜데 굳이 돈이 많이 드는 영부인을 둘 필요가 없다는 현실적 이유도 있다. 트리에르바일레르는 운전사와 비서 등 5명의 직원을 뒀고 각종 정부 지원으로 자선활동을 펼쳤다. 1월 말 여론조사에서 프랑스인 54%가 “대통령의 배우자는 어떤 공식적 역할도 맡지 않고 정부가 지원도 해주지 않아야 한다”고 답했다.

이를 의식한 올랑드 대통령은 “미래에는 엘리제궁에 영부인이 없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의 보좌진이 “당분간 독신남 대통령으로 남아야 한다”고 강하게 조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올랑드는 스캔들 이후 네덜란드와 바티칸을 혼자 다녀왔고 11일부터 시작되는 미국 방문도 홀로 간다.

올해 프랑스에서는 지방선거, 유럽의회 선거, 상원의원 선거 등 3대 선거가 있다. 신년 벽두에 터진 대통령의 스캔들로 집권 사회당은 “올해 선거가 다 끝났다”며 울상이다. 올랑드의 지지율은 이달 초 조사에서 취임 이후 처음으로 20% 아래로 떨어졌다. 안주인이 없어진 엘리제궁에서 그가 난국 돌파의 묘수를 찾아낼지 주목된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파리=전승훈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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