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정신의 열대, 멱라를 건너가면 거기 슬플 것 다 슬퍼해 본 사람들이 고통을 씻어 햇볕에 널어두고 쌀 씻어 밥 짓는 마을 있으리 더러 초록을 입에 넣으며 초록만큼 푸르러지는 사람들 살고 있으리 그들이 봄 강물처럼 싱싱하게 묻는 안부 내 들을 수 있으리
오늘 아침 배춧잎처럼 빛나던 청의(靑衣)를 물고 날아간 새들이여 네가 부리로 물고 가 짓는 삭정이 집 아니라도 사람이 사는 집들 남(南)으로만 흘러내리는 추녀들이 지붕 끝에 놀을 받아 따뜻하고 오래 아픈 사람들이 병을 이기고 일어나는 아이 울음처럼 신선한 뜨락 있으리
저녁의 고전적인 옷을 벗기고 처녀의 발등 같은 흰 물결 위에 살아서 깊어지는 노래 한 구절 보탤 수 있으리 오래 고통을 잠재우던 이불 소리와 아플 것 다 아파 본 사람들의 마음 불러 모아 고로쇠 숲에서 우는 청호반새의 노래를 인간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말로 번역할 수 있으리
내 정신의 열대, 멱라를 건너가면
지그시 경락을 짚는 듯, 마음의 줄을 누르고 튕긴다. 아프고 시원하고 몽롱하다. ‘남(南)으로만 흘러내리는 추녀들이/지붕 끝에 놀을 받아 따뜻하고’ ‘오래 아픈 사람들이 병을 이기고 일어나는/아이 울음처럼 신선한 뜨락’, ‘청의(靑衣)를 물고 날아가는’ 듯한 청호반새…. 이토록 생생한데, 이게 한갓 꿈이라는 걸 어렴풋이 깨달으면서 좋은 꿈을 꾸는 것 같다. 이것은 현실이 아니다. 참으로 실감나는 꿈! ‘슬플 것 다 슬퍼해 본 사람들’ ‘아플 것 다 아파 본 사람들’에게 안식과 평화가 주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시인의 꿈! ‘처녀의 발등 같은 흰 물결 위에/살아서 깊어지는 노래’다.
이기철의 다른 시 ‘멱라의 길1’에는 ‘지상에서 얻은 병 모두 쓸어 저 강물에 띄우겠네’라는 구절이 있다. 멱라는 고대 중국 초나라의 시인 굴원이 조국이 패망의 길에 들어선 것에 울화가 치밀고, 비통해 몸을 던졌다는 강이다. 그걸 염두에 두고 읽으니, 운율도 아름다운 이 서정시에서 지사적 아픔과 비관도 설핏 느껴진다. ‘일생이 아름다워서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일생이 노역(勞役)과 상처 아문 자리로 얼룩져 있어도/상처를 길들이는 마음 고와서 아름다운 사람은 있다’(시 ‘멱라의 길1’에서). 멱라를 ‘건너가야’ 닿을 수 있는 그곳이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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