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현미]“자식은 아버지를 몰아내야 해”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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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미 출판국 전략기획팀장
김현미 출판국 전략기획팀장
2011년 한국 초연에 이어 얼마 전 재공연까지 성공리에 마친 연극 ‘레드’는 1950년대 미국 뉴욕에서 잭슨 폴록과 함께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던 화가 마크 로스코의 일화를 토대로 만든 2인극이다. 극 중 로스코는 뉴욕 중심가의 고급 레스토랑 벽을 장식할 그림을 의뢰받고 조수 켄을 고용한다. 작업 틈틈이 로스코는 무식하기 짝이 없는 켄에게 예술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특히 추상표현주의가 어떻게 입체파를 밀어냈는지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자부심마저 배어 나온다. “이젠 아무도 입체파 그림을 그리지 않아. 자식은 아버지를 몰아내야 해. 존경하지만 살해해야 하는 거야.” 그러나 정작 당시 새로운 미술 사조로 떠오른 팝아트는 인정하지 않았다. 앤디 워홀의 수프 깡통이나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만화는 예술이 아니라 비즈니스일 뿐이라고 매도한다. 그런 그에게 켄은 돌직구를 날린다. “예술의 상업화를 비난하시지만 결국 선생님, 돈 받으셨잖아요!”

사실 로스코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다. “인생에서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단 한 가지야. 어느 날 블랙이 레드를 집어삼키는 것이지.” 레드는 열망이고 블랙은 절망이다. 레드는 밀려오는 것이고 블랙은 사라지는 것이다. 로스코는 마지막 순간 레스토랑과의 계약을 파기하고 선금을 돌려준다. 돈 대신 자신의 ‘레드’를 지켜낸 것이다. 그리고 조수 켄에게 말한다. “너는 해고야. 네 세상은 저 밖에 있어! 저 밖에서 네 날개를 펼치란 말이야.”

부와 명성을 다 가진 중년의 로스코와 오로지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젊은 켄. 변화를 두려워하는 로스코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켄. 두 사람에게는 부모와 자식, 물러갈 세대와 이어갈 세대의 모습이 투영돼 있다. 한국의 현실을 돌아보자. 저성장 고령화사회로 접어들면서 세대 갈등은 이제 ‘세대 전쟁’이라 할 만큼 위험수위에 와 있다. 정년 연장, 노령연금 등 새로운 정책이 발표될 때마다 어느 쪽도 자기 몫을 양보할 수 없다고 아우성이다.

‘세대 전쟁’의 저자 전영수 씨는 이를 ‘부자 아빠와 가난한 아들의 밥그릇 쟁탈전’이라 했다. 부자 아빠도 할 말은 있다. 노후 준비랄 것도 없이 가진 것은 집 한 채뿐인데 서른이 넘도록 여전히 취업준비생인 이른바 ‘빨대족’(부모의 노후자금을 축내는 자녀를 가리키는 속어) 때문에 은퇴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이미 2011년 부모와 동거하는 30∼40세 자녀가 50만 명을 넘었고 그중 상당수가 경제적 이유 등으로 독립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2012년에는 60대 이상 남성 취업자 수가 20대 남성 취업자 수를 앞질렀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73년 전 이미 이 사태를 예감했다. “100년이 더 흐른 뒤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여든 넘은 노인일지도 모르겠다. 육십 먹은 젊은이들은 그들을 몰아내려고 안달을 하겠지만 중요한 자리는 이미 노인들이 전부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는 어떤 진보도 불가능하다.”(‘노인들을 위한 나라’)

러셀이 한탄한 대상은 노인들의 나라가 아니라 변화 없는 세상이다. “우리는(글을 쓸 당시 59세였던 러셀 자신을 포함해) 변화가 필요하다고 머리로는 확신하지만, 진짜 변화는 감당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이를 먹은 급진주의자는 무능해야만 행복할 수 있는 서글픈 상황에 처해 있다.” 상징적인 의미에서조차 ‘아버지를 죽일 수 없는’ 무기력한 젊은 세대와, 변화를 외면한 채 현실에 안주하는 무능한 기성세대. 세대 전쟁의 책임이 어느 쪽에 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김현미 출판국 전략기획팀장 khmzip@donga.com
#레드#마크 로스코#저성장 고령화사회#세대 전쟁#노후자금#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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