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스토리텔링 in 서울]서울 용산구 서빙고동의 사연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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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얼… 금보다 귀한 얼음 보관처
오싹… 서슬 퍼렇던 보안사 분실

1950년대 꽁꽁 얼어붙은 한강에서 인부들이 채취한 얼음덩이를 소달구지에 실어 나르는 모습. 조선시대에도 이처럼 겨울에 톱으로 한강 얼음을 잘라내 빙고에 저장했다가 여름에 사용했다. 동아일보DB
1950년대 꽁꽁 얼어붙은 한강에서 인부들이 채취한 얼음덩이를 소달구지에 실어 나르는 모습. 조선시대에도 이처럼 겨울에 톱으로 한강 얼음을 잘라내 빙고에 저장했다가 여름에 사용했다. 동아일보DB
4일은 봄에 접어든다는 입춘(立春)이었지만 추위가 제법 매섭다. 변변한 난방시설이 갖춰지지 않았던 조선시대에는 체감 추위가 더 혹독했을 터. 하지만 겨울에 날이 풀리면 더 춥게 해 달라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날이 추워야 한강이 꽁꽁 얼어붙어 여름 나기에 필요한 얼음을 많이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냉장고 한 대도 모자라 김치냉장고, 와인냉장고까지 끼고 사는 요즘 사람들에겐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다.

○ ‘빙고’, 얼음에 담긴 경제학

조선시대 얼음 저장창고인 ‘빙고(氷庫)’는 지금의 서울 용산구 서빙고, 동빙고동에 있었다. 동네 이름도 빙고에서 유래했다. 1396년 설치된 서빙고는 궁중, 문무백관 및 환자나 죄수들에게 나눠줄 얼음을 저장했다. 진흙으로 된 산에 군데군데 지하실 모양으로 땅을 파고 벽을 회로 발라 바람이 통하지 못하게 8채의 움막집 형태로 지어 얼음을 보관했다. 음력 섣달 한강에서 얼음을 채취해 두께 약 12cm, 둘레 약 180cm 크기인 얼음 덩어리 13만4974정을 보관했다. 현재 용산구 서빙고로51길에 서빙고 터 표지석이 있다.

동빙고는 한강변 두뭇개(현재 성동구 옥수동)에 있었다. 동빙고에 저장된 얼음은 국가의 여러 제사에 쓰였다. 연산군이 옥수동 일대를 사냥터로 삼으면서 1504년 동빙고를 서빙고 옆으로 옮겨왔다.

냉장고가 없었던 시절 얼음은 금붙이보다 귀한 존재였고 거대한 이권사업이었다. 18세기 들어 상업이 발달하고 어물과 육류의 수요가 늘어나자 상인들은 얼음산업에 눈독을 들였다. 일부 상인이 얼음을 독점하면서 얼음 값이 급등했다. 덩달아 고기나 생선 가격이 오르는 폐단이 나타나기도 했다.

빙고제도는 1896년 폐지됐지만 1950년대 초까지도 겨울철이면 한강에서 얼음을 채취하는 톱질 소리가 요란했다. 그러나 한강이 오염되고 새로운 제빙술의 도입, 냉장고 보급 등으로 영원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 얼음보다 서슬 퍼런 기억

서빙고동은 빙고 외에도 권력과 관련된 곳이 여럿 있다. 서울시 민속자료 2호로 지정된 서빙고동부군당은 사당에 조선 태조 내외를 모시고 있다. 조선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 한명회, 권람 등과 계유정난을 모의하던 창회정(蒼檜亭)이라는 정자도 있었다.

얼음보다 더 서늘한 기억도 있다. 서빙고 터 인근 서빙고초등학교 앞에 있던 보안사 서빙고 분실이다. 정식 명칭은 ‘국군보안사령부 대공처 6과’지만 ‘서빙고 분실’, ‘빙고호텔’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79년 12·12쿠데타 당시 신군부세력에 반대했던 인사들이 강제로 구금됐고, 독재정권에 저항하던 각계 인사들이 고통을 당했던 곳이다. 서빙고 분실은 1990년 당시 이곳에 근무 중이던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 민간인 사찰 사실을 폭로하면서 문을 닫게 됐고, 지금은 아파트로 바뀌었다.

서울시는 이처럼 서빙고와 관련된 얘기를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서빙고 터 한강 건너편인 반포한강공원에 ‘조선의 냉동실, 빙고(氷庫)’라는 이름의 디자인 패널을 설치했다. 이외에도 잠수교가 안보교라는 별칭을 갖게 된 이야기, 서래섬이 만들어진 경위 등 다양한 이야기를 담았다. 서울시 관광정책과 02-2133-2817

김재영 기자 redfoot@donga.com
#서빙고동#얼음 보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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