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차장 구분없이 “매니저”… 대화 늘고 일하는 맛 쏠쏠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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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세상을 바꿉니다]<1부>나는 동네북이 아닙니다
기업들의 호칭 실험

“김○○ 매니저, 오늘 미팅 준비는 잘돼 가요?”

포스코에 입사한 지 올해로 7년째인 김모 씨(33)는 3년 전 ‘김 대리’에서 ‘김 매니저’가 됐다. 이 회사가 2011년 대리부터 차장까지의 직급을 ‘매니저’로 통일하면서부터다. 타 업계에 비해 보수적인 철강업계이지만 새 호칭제도를 도입한 이후로는 수직적인 상하관계가 상당 부분 해소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 씨는 “대리∼차장이 모두 매니저라는 직급으로 통일됐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연령과 연차가 포함돼 있다”면서 “이전까지는 회의 중 쉽게 말을 꺼내기 어려웠지만 새 호칭이 도입된 이후로는 선배들과의 대화가 훨씬 자연스러워졌다”고 말했다.

○ 주요 기업들, 잇달아 호칭 단순화

“일 그딴 식으로 해서 언제 과장 될래?”

“대리 나부랭이가 뭘 안다고….”

회사에서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던 이 같은 핀잔도 점차 사라져 갈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국내 기업들이 세세하게 나뉘어 있던 직급별 호칭을 단순화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유는 기업들이 해외 진출에 나서면서 국가별로 제각각인 호칭에 대한 인식에 우리나라에서 흔히 쓰는 직급 체계를 일괄적으로 적용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울러 수평적 조직문화를 확산하고 외부 관계자와의 소통에서도 전문성을 갖고 대등하게 업무에 임하게 하려는 의도에서다.

기업들의 ‘호칭 실험’은 선후배 직원들이 서로 주고받는 말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호칭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아랫사람’에겐 당연하게 여겨졌던 하대(下待)를 삼가는 분위기가 생겼고 존중을 담은 말을 쓰기 시작했다. 연차가 낮은 직원들의 자존감과 업무 만족도가 높아졌음은 물론이거니와 대졸 구직자들의 취업 선호도가 높아지는 효과도 가져왔다.

재계 10대 그룹 중에서는 CJ가 2000년 모든 임직원의 호칭을 ‘님’으로 통일했다. SK텔레콤은 2006년 인사제도 혁신을 발표하고 매니저 직급을 도입했다. 기존 직책명을 유지하는 본부장, 실장 등 직책자를 제외한 직원들은 호칭을 매니저로 모두 단일화했다. 매니저라는 호칭에는 직위와 연공서열에 상관없이 ‘자신의 업무에 대해 전문지식과 책임을 가진 담당자’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회사 측은 설명했다.

이 밖에도 KT 한화 롯데 유한킴벌리 아모레퍼시픽 아주 등 대기업들이 직원 호칭을 매니저로 통일하거나 직급별 구분을 줄이고 있다. ‘카카오톡’으로 유명한 카카오는 한발 더 나아가 이름과 직급 대신 영어이름으로 된 애칭을 쓴다. 김범수 이사회 의장은 ‘브라이언’, 이석우 공동대표의 이름은 ‘비노’다.

이처럼 수평적 호칭을 도입한 기업에 근무하는 사원들은 대부분 “업무 효율성이 높아졌다”는 반응. 더욱 자유로운 의견 개진이 가능해졌다는 이유에서다.

최근 새 호칭제도를 도입한 A기업에 근무하는 유모 씨(42)는 “처음엔 상사를 ‘님’이라고 부르는 게 무척 어색했지만 조금씩 입에 붙기 시작했다”면서 “호칭에 연연하지 않다 보니 후배를 대할 때도 전처럼 말을 함부로 하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유 씨는 “자연스레 서로를 존중하며 말을 주고받다 보니 토론이 활발해지고 새로운 아이디어도 많이 얻게 된다”고 덧붙였다.

김재휘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기업 내 위계질서를 중시했지만 최근에는 창의성이 기업 경쟁력으로 직결되는 만큼 자유로운 의사소통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 ‘경직된 의사소통’이 창의성의 걸림돌


1997년 8월 김포공항발 대한항공 801편이 괌 국제공항에서 추락해 225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작가 맬컴 글래드웰은 저서 ‘아웃라이어’에서 이 사고를 언급하며 기장과 부기장 사이의 의사소통 문제를 중요한 요소로 꼽았다. 부기장이 기장에게 위험한 상황을 직설적으로 전하면서 충고를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사례는 경직된 의사소통이 때로는 재앙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해 5월 직장인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창조경제시대 기업문화 실태와 개선과제’에 따르면 구글, 페이스북 등 창의적 기업문화를 가진 글로벌 기업을 100점으로 했을 때 우리 기업의 평균 점수는 59.2점에 불과한 것으로 집계됐다.

응답자 10명 중 6명(61.8%·309명)은 기업의 창의성을 가로막는 기업문화로 ‘상명하복의 경직된 의사소통 체계’를 지목했다. 자신이 속한 직장이 보수적 기업문화를 갖고 있느냐는 질문에는 71.5%가 ‘그렇다’고 답했다. 개선 방안으로는 87.5%가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통해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기업문화’를 지목했다.

박종갑 대한상공회의소 상무는 “기업문화에서 조직원 개개인의 개성이 점차 중요해지고 있다”면서 “혁신을 위해서는 상명하복의 보수적인 문화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이뤄지는 개방적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진석 기자 ge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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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언어폭력#기업 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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