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은 작가 “기쁨과 행복의 세월 뒤엔 천개 만개의 흉터가”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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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리 선생의 그녀’ 서영은 작가, 자전적 소설 ‘꽃들은 어디로 갔나’ 출간

소설가 서영은은 “김동리 선생이 이 소설을 보면 뭐라고 할 것 같은가”라는 질문에 “(소설로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리라는 것을) 아마 각오하고 있었을 것”이라면서 수줍게 웃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소설가 서영은은 “김동리 선생이 이 소설을 보면 뭐라고 할 것 같은가”라는 질문에 “(소설로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리라는 것을) 아마 각오하고 있었을 것”이라면서 수줍게 웃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스물네 살 때 문단의 거목 김동리(1913∼1995)를 만났다. 부인(소설가 손소희)이 있던 김동리와 사랑에 빠졌고, 부인이 세상을 떠난 뒤 1987년 마흔넷의 나이로 그와 결혼했다. 1990년 뇌중풍으로 쓰러진 김동리와는 5년 뒤 사별했다. 소설가 서영은(71)에게는 열정과 기쁨, 고통과 고독이 공존하는 삶이었다. 비밀스러운 젊은 연인에서 서른 살 차이 나는 세 번째 부인이 된 가냘픈 여인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서영은은 소설가로 살아온 지 46년 만에, 남편을 떠나보낸 지 19년 만에 김동리와의 만남부터 그와 결혼해서 산 기간의 이야기를 장편소설 ‘꽃들은 어디로 갔나’(해냄)에 새겨 넣었다. 자전적 소설을 써보겠다고 출판계약서에 사인한 것이 20년 전 일이다. 제목은 어느 카페에서 흘려들은 노래의 한 구절에서 따와 2000년대 초에 이미 정해뒀다.

4일 간담회에서 서영은은 “문학을 통해 찾아온 구도의 과정이 김동리 선생과의 인연에 다 담겨 있는데 이를 놔두고 계속 다른 소재로 글을 써온 것이 성에 차지 않았다”고 했다.

“이 소설을 쓰면서 이미 흘러간 시간이지만 그 시절을 회상할 때 많이 아팠다. 고통스러워서 몇 차례 덮어버리려고도 했다.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나 스스로가 내가 아닌 듯 객관화되면서 소설과 나 사이에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이 작품을 마무리 지었다.”

1988년 서울 청담동 집에서 지인들과 같이한 저녁 식사. 한가운데 두 사람이 김동리와 서영은. 해냄 제공
1988년 서울 청담동 집에서 지인들과 같이한 저녁 식사. 한가운데 두 사람이 김동리와 서영은. 해냄 제공
소설은 3인칭으로 서술된다. 작가이자 전직 문예지 기자 출신의 젊은 아내 강호순, 성공한 문필가 박 선생, 박 선생의 두 번째 부인이자 작가인 방 선생이 등장한다. 남편의 지난 생활, 전처의 흔적만 켜켜이 쌓인 공간에서 호순은 자기만의 방 한 칸 없이 집안을 떠돈다. 남편은 갖가지 수집품이며 사회적 지위와 부를 잃을까 전전긍긍하고 아내에게마저 인색하기 짝이 없다. 빛나던 사랑은 결혼 생활 속에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이야기 전개, 인물의 말은 거의 사실에 기초했다. 그 시절의 일기가 있긴 하지만 여러 정황들이 이상하게도 눈 위의 발자국처럼 늘 마음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기억을 더듬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는 두 사람의 관계를 김동리의 ‘황토기’에 빗대어 설명했다. 소설 속 억새와 득보처럼 서로가 있기에 자기 삶이 확인되는 관계,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지 않는 관계였다고.

“그 관계로 인해 치러야 했던 대가는 혹독했다. 하지만 후회나 여한은 없다. 돌을 던질 사람은 던지라고 나설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좋았다는 자기 확신이 있다. 김동리 선생은 엄청난 기쁨과 행복을 주기도 했지만 천 개 만 개 흉터를 남기기도 했다. 그 모든 것 하나하나가 오늘의 나를 만들었고 그것에 깊이 감사한다.”

소설에서 ‘노인’ ‘남편’으로 지칭되는 박 선생이 쓰러진 뒤 휠체어 신세를 지는 마지막 장에서는 돌연 1인칭 서술로 바뀐다. 병원, 의사, 수술 같은 모든 결정권은 전처의 자식들에게 넘어가고 한 달 만에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세어 버린 아내는 조롱과 비웃음, 학대를 무릅쓰고 병원을 찾아간다. 전처의 한 아들은 말한다. “너는 우리 아버지 요강에 지나지 않아. 이제 필요 없어.”

“이 소설을 쓰기로 결심을 굳힐 때부터 이것은 내 삶의 자취이고 그 책임을 지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누가 어떤 편견이나 자기 식의 고정관념으로 내게 돌을 던진다면 내가 막겠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구도의 과정에서 한 획을 그었다고 했다. 이후 두 권의 자전적 소설을 더 연결시켜야 구도가 완성된다는 설명이다. 사랑을 통해 절대를 추구한 현실적 대상이 사라졌을 때 혼자 감당해야 하는 시간, 그 삶에서 내면에 이슬처럼 맺히는 열매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을 고통스러워서 외면해 온 자기 내면을 직시하는 자리까지 데려가고 싶다. 그 자리에서 펑펑 울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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