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치] 공주님 꿈 이뤘다, 남태평양 통가의 ‘쿨러닝’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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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지 1인승 나서는 브루노 바나니
“겨울올림픽 선수 내보내는게 소원”… 2008년 국내 선발대회 뽑힌 대학생
6년간 피나는 노력 끝 기적의 출전… 후원 독일 속옷회사 이름으로 개명

태평양 섬나라 통가의 브루노 바나니(27)가 2012년 2월 독일 알텐베르크에서 열린 세계루지선수권에 참가해 경기를 하고 있다. 그는 이 대회 예선전에서 18위를 기록했다. 알텐베르크=Getty Images 멀티비츠
태평양 섬나라 통가의 브루노 바나니(27)가 2012년 2월 독일 알텐베르크에서 열린 세계루지선수권에 참가해 경기를 하고 있다. 그는 이 대회 예선전에서 18위를 기록했다. 알텐베르크=Getty Images 멀티비츠
남태평양의 작은 섬 통가 왕국의 살로테 마필레오 필로레부 투이타 공주(63)의 꿈은 겨울올림픽에서 뛰는 자국 선수를 보는 것이었다. 공주의 희망에 따라 통가 정부는 2008년 10만 명 남짓한 국민을 대상으로 루지 선수 선발 대회를 열었다.

대표 선수로 뽑힌 이는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공부하던 당시 21세의 푸아헤아 세미. 눈 한 송이 내리지 않는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서 또 하나의 ‘쿨러닝’(열대 국가 자메이카 봅슬레이 선수단의 1988년 캘거리 겨울올림픽 출전을 다룬 영화)이 시작된 것이다.

2010년 밴쿠버 겨울올림픽을 목표로 그는 훈련에 매진했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루지 세계 최강국인 독일 대표팀 선수들과 함께 훈련을 했다. 그렇지만 1년의 준비 기간은 너무 짧았고, 밴쿠버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는 데 실패했다.

그의 도전보다 더 화제가 됐던 건 개명(改名)이었다. 그는 독일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면서 이름을 ‘브루노 바나니(Bruno Banani)’로 바꿨다. 마침 독일에는 똑같은 이름의 속옷 회사가있었다. 독일 언론은 이 우연을 대서특필했다. 세미는 개명의 이유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진실이 밝혀진 것은 2012년이다. 독일 잡지 슈피겔은 세미의 개명이 이 속옷 회사의 마케팅 전략 때문이라는 사실을 폭로했다. 세미에게 훈련비 등을 지원하는 대가로 이름을 바꾸도록 한 것이다.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이던 토마스 바흐 씨(현 IOC 위원장)는 “이런 식의 개명은 잘못된 일이며 삐뚤어진 마케팅 아이디어”라고 맹비난했지만 이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논란 속에서도 세미의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2011년 아메리카컵대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했고, 지난해 말 미국에서 열린 국제루지연맹(FIL) 루지 월드컵 남자 1인승에서 출전 선수 42명 중 28위에 올라 자력으로 올림픽 티켓을 따냈다. 통가 출신으로는 첫 겨울올림픽 출전이다. 여권에 찍힌 브루노 바나니라는 이름으로 소치 올림픽에 나서는 그는 9일 산키 슬라이딩 센터에서 열리는 루지 남자 1인승 경기에 출전한다.

얼마 전 소치에 입성한 바나니는 “국민이 정말 기뻐하고 있다. 특히 공주님의 꿈이던 겨울올림픽 출전을 이뤄 내 스스로도 정말 기쁘다”고 말했다. 통가 정부는 바나니의 올림픽 출전을 지원하기 위해 왕실이 운영하는 통가루지협회에 3000만 원가량을 지원했다.

바나니의 겨울올림픽 출전은 영화 ‘쿨러닝’과 종종 비교된다. 이 영화를 직접 봤다는 바나니는 지난해 캐나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쿨러닝’과 내 이야기가 비슷하긴 하지만 어떤 면에선 내가 좀 더 극적인 듯하다”고 말했다.

소치=이헌재 기자 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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