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기관 뺨치는 은행창구 정보수집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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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 “아드님 공부 잘하죠”→고객 “고3이라 걱정”
‘○○○고객 고3자녀 있음’ 전산 입력
은행들, 인사고과에 반영하며 독려

1억 건이 넘는 개인정보 유출로 국민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국내 주요 시중은행들이 전국 7700여 곳의 점포 창구에서 재산, 빚, 자녀 상황 등 각종 개인 신상정보를 수집해 영업에 적극 활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른바 ‘고객관계관리(CRM·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로 일컬어지는 영업방식이다.

고객정보를 활용한 선진금융 기법이지만 과도한 정보 수집과 활용으로 소비자의 정보주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금융당국도 시중은행이 CRM을 활용한 무리한 정보 수집과 영업 행태가 없는지 집중적으로 살피고 있다.

○ 고객에 대해 시시콜콜 알고 싶은 은행

은행들의 정보 수집은 크게 두 단계로 나뉜다. 계좌를 개설할 때 신청서에 써내는 정보가 1단계라면, 단골·우량고객에게 하는 ‘고객 조사’는 2단계다. 은행들은 개인정보 보호지침에 따라 고객이 제공하는 가족 및 주거 상황, 결혼 여부 등의 정보를 점포나 홈페이지, 전화 등으로 수집해 영업에 활용할 수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신청서로 받는 정보는 주소, 전화번호 등 기본적인 항목이어서 영업에 큰 도움이 안 된다”며 “주거래 고객에게 직접 물어 얻는 정보가 알짜 정보”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시중은행은 CRM 자체 전산시스템을 구축하고 고객들의 성향과 정보를 일일이 축적한다. 고객의 재산, 채무, 납세정보 등과 자녀가 언제 상급학교에 가는지, 예·적금 및 대출 만기는 언제 돌아오는지 등도 수집 대상이다. 창구 직원이 슬쩍 “아드님은 공부 잘하죠?”라고 물을 때 고객이 “내년에 고3이라 걱정”이라고 답하면 이를 전산시스템에 등록하는 식이다. 이렇게 모인 정보는 전국 모든 점포 및 계열사와 공유한다. 창구 직원들은 기존 가입 상품을 토대로 분석한 수익률과 투자성향, 해당 고객이 선호할 것으로 보이는 금융상품까지 확인할 수 있다. 한 은행 직원은 “고객이 이런 분석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 그것까지 기록해 공유한다”고 말한다.

몇몇 시중은행은 정보 수집을 강화하기 위해 ‘CRM 정보관리’를 영업점포 평가항목에 포함시키고 있다. 고객정보를 많이 모은 영업점포와 이를 적극 활용한 직원에게 높은 점수를 줘서 경쟁을 붙이는 방식이다. A은행은 전체 1만 점 중 정보수집에 100점을 배점했다. 이 은행 관계자는 “배점이 높지는 않지만 성과평가 순위가 결국 10∼20점 차로 결정되기 때문에 신경이 쓰인다”고 말했다.

○ 선진금융 기법 vs 정보주권 침해 논란


시중은행들은 1990년대 후반부터 경쟁적으로 CRM 기법을 도입했다. 초기에는 장부에 펜으로 쓴 정보를 전산에 옮기는 수준이었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에는 정보기술(IT)을 활용해 수집한 정보를 다양한 방법으로 분석하고 신상품 개발, 점포별 경영전략 수립 등에 활용하고 있다.

CRM은 은행 유통업체 등 서비스 기업들이 활용하는 선진 마케팅 기법으로 각광받았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묻지 마’ 영업에서 벗어나 ‘고객 맞춤형 영업’으로 실적과 고객 만족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융권의 개인정보 부실 관리실태가 드러나면서 CRM을 통한 고객정보 통합관리가 자칫 감시의 사각지대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CRM 도입 초기에는 생일, 결혼기념일에 ‘우대금리 제공’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초보적 수준이었지만 최근에는 창구에서 고객이 흘린 한마디까지 수집 대상이 됐다. 계좌 개설 시 무심코 서명한 ‘정보공유 동의’를 근거로 고객의 행동과 말까지 무차별적으로 분석하고 수집하는 것은 소비자의 정보주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금융당국도 CRM을 통한 은행의 고객정보 관리에 문제가 없는지 들여다보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전 시중은행을 대상으로 고객정보 관리실태 현장점검에 나섰다. 금감원 관계자는 “정보공유 자체가 불법은 아니지만 무리한 정보공유로 고객들의 피해가 발생하면 문제가 될 수 있다”며 “개인정보 수집에 대한 총체적인 점검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훈 기자 january@donga.com
#은행 정보수집#개인정보 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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