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이종찬 DJ정부 초대 국가정보원장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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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수술 필요하지만 무장해제까지 가선 안 된다”

이종찬 초대 국가정보원장은 지금도 “우리 국정원” “우리가 일하기 좋을 때” 식으로 자신과 국정원을 일체화해서 말할 만큼 국정원에 진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1965년 중앙정보부 공채 1기로 입사해 ‘영원한 정보맨’인 그는 “국정원을 강화하는 개혁이어야 한다”고 열정을 다해 강조했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이종찬 초대 국가정보원장은 지금도 “우리 국정원” “우리가 일하기 좋을 때” 식으로 자신과 국정원을 일체화해서 말할 만큼 국정원에 진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1965년 중앙정보부 공채 1기로 입사해 ‘영원한 정보맨’인 그는 “국정원을 강화하는 개혁이어야 한다”고 열정을 다해 강조했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언젠가 ‘응답하라 2013’이란 드라마가 만들어진다면 국가정보원 요원을 주인공으로 내세울지 모르겠다. 올 한 해 국정원은 대한민국 정치의 한복판에서 소용돌이를 쳤다. 대선 개입 댓글 사건을 비롯해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 및 유출 사건,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 사건…. 2013년을 장식한 주요 사건의 주연(主演)은 단연 국정원이었다.

한 해를 정리하며 김대중 정부 시절의 이종찬 초대 국정원장(77·1998년 3월∼1999년 1월 국가안전기획부장, 1999년 1∼5월 국정원장)을 만난 것도 도대체 이런 일이 왜 벌어졌는지 속 시원하게 듣고 싶어서다.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를 거쳐 국정원으로 이름을 바꾼 지 올해로 14년. 과연 정보기관이 변한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지 궁금했다.

인터뷰는 대선 1년째인 19일 이 전 원장이 관장을 맡고 있는 서울 종로구 우당(友堂)기념관에서 진행했다. 이 전 원장은 독립운동가인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다.

정치개입 논란 대통령도 책임

―국정원이 이름만 바꿨지 국내 정치 개입 같은 폐단은 그대로인 것 같다. 왜 이렇게 됐나.

“사용자와 관리자 모두의 잘못이다(사용자는 대통령, 관리자는 국정원장을 뜻한다). 국정원이 원훈(院訓)을 바꿀 때부터 예견된 일이다. 처음 원훈은 ‘정보는 국력이다’였다. 여기에는 개인의 가치 판단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원훈을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無名)의 헌신’으로 바꿨다. 자유와 진리는 상대적 개념이다. 이 원훈대로라면 내가 생각하는 자유와 진리에 반대하면 당연히 반박해야 한다. 그것이 국가를 위한 헌신이기 때문이다.”

국정원은 이명박 정부 때인 2008년 9월 19일 이전 원훈이 정보기관의 임무와 기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로 원훈을 바꿨다.

―그렇다면 국정원을 이명박 전 대통령과 원세훈 전 원장이 망쳐놓은 것인가.

“1999년 1월 안기부를 국정원으로 바꾼 뒤 정문 앞에 실물 크기의 광개토대왕비 복제비를 세웠다. 고구려 광개토대왕 때 우리나라는 가장 융성했고 해외로 뻗어나갔다. 직원들이 건물을 드나들며 광개토대왕비를 보고 그 정신을 본받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때 광개토대왕비를 어디론가 치워버렸다. 해외 정보를 강화하는 대신 다시 국내 정보로 눈을 돌리도록 만든 상징적 사건 아니겠나.”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국정원이 통일부처럼 됐다는 지적이 있다. 대북 휴민트(인적 정보)도 당시 무너졌다는 것 아닌가.

“모르고 하는 소리다. 국정원을 (전 정권에서) 인수받아 대공 능력과 해외 정보 수집 능력을 강화했다. 햇볕정책을 펴며 북한과 친하게 지낼 때 오히려 대공요원들에게는 간첩을 더 많이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동방정책을 펼 때 동독은 간첩을 더 많이 보냈다. 브란트 총리의 비서도 동독 스파이 아니었나. 간첩은 자기들이 일하는 것을 과장하기 마련이다. 간첩이 북한에 엉뚱한 보고를 올려 햇볕정책을 훼손하려 한다는 내용을 김대중 대통령에게 여러 차례 보고한 적도 있다.”

정보의 私的이용 유혹 끊어야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도 국정원은 여전히 도청을 일삼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감독이 소홀했다. 그것은 잘못이다. 어떤 관행을 바꿀 때 한 번에 되지 않는다. 사용자와 관리자가 계속 같은 메시지를 보내 바로잡아야 했다. 하지만 문화가 바뀌는 과정에서 관성이 작동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정원의 정치 개입을 확실히 차단하려 했나.

“내가 국정원장 때 정부가 농협 축협 수협 등의 통합을 추진하자 전국이 시끄러웠다. 내부 회의를 하는데 한 지역지부장이 ‘협동조합 통합 문제를 우리에게 맡겨 달라’고 하더라. 조합장들의 약점을 잘 아니 통합을 밀어붙일 수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솔깃해 김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김 대통령은 한참 말이 없더니 ‘우리가 그런 것 안 하려고 여기 온 것 아니오’라고 하더라. 순간 얼마나 부끄럽던지…. 김 대통령과 내가 서로 견제해 정치 개입 여지를 차단할 수 있었다.”

―정치 개입은 그렇다 치더라도 무리하게 특정 인맥을 심어 국정원 조직을 흔든 것은 사실 아닌가.

“그런 점은 있었다. 1997년 대선 때 내가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매일 아침 김대중 후보 집에 가서 브리핑을 했다. 언제부턴가 당시 안기부 고위 간부가 매일 그 집에 드나들더라. 대선 이후 김 대통령이 그 간부를 중용해 달라고 했지만 수용하지 않았다. 국정원 정보를 빼돌렸다가 걸려서 잘린 호남 출신 직원이 있었다. 호남라인에서 이 직원의 복직을 부탁했으나 그것도 거절했다. 하지만 내가 국정원을 나오자 모두 중용됐다. 이후 조직의 질서가 무너진 측면이 있다.”

―국정원을 바로 세우려면 무엇이 중요한가.

“사용자든 관리자든 누구나 정보를 사적으로 활용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내가 국정원장일 때 존안자료 등 각종 파일을 모두 디지털화했다. 나도 내 파일을 보고 싶어 컴퓨터에 접속해 열어보니 아무 내용이 없더라. 내가 내 파일을 보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것이다. 그렇게 조치한 국장을 나무라지 않았다. 정보기관에는 ‘필요한 것만 보라’는 금언(金言)이 있다. 사용자의 의지도 중요하고, 정보기관장도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서 철학자 수준의 고민을 해야 한다.”

―남재준 현 국정원장은 철학자 수준의 고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원세훈 전 원장 시절 국정원이 너무 문약해져서 강골인 남 원장 임명에 기대가 컸다. 하지만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하는 것을 보고 판단력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대화록을 공개한 뒤 혼란만 커졌다. 앞으로 남북대화에도 상당한 지장을 줄 것이다.”

10·26은 정보기관 갈등의 비극

―국정원장 출신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포기했다고 보나.

“노 전 대통령의 어투나 자세에는 분명 문제가 많았다. 그렇다고 서해 NLL를 포기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임기 말에 북한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 가더라도 여야 대선 후보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이 옳았다.”

―국정원이 최근 내놓은 자체 개혁안은 어떻게 평가하나

“중요한 것은 전(全) 직원의 정치 개입 금지 서약 같은 게 아니다. 언제는 서약을 안 했나. 원장과 차장이 정치에 개입하거나 관련 지시를 내리면 무겁게 처벌하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을 만들어야 한다. 정보를 정책으로부터 분리해야 한다. 정보기관이 정부 정책에 직접 관여해선 안 된다. 정부가 햇볕정책을 추진한다고 해서 햇볕정책에 유리한 정보만 보고하고 불리한 정보를 감춰서는 안 된다. 북한 관련 모든 정보를 제공해 청와대나 부처가 균형 있게 사안을 보도록 해야 한다.”

이 전 원장은 국정원 개혁 방안을 얘기하다가 다소 뜬금없이 “10·26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그 사건 말이다.

“10·26은 정보기관이 국내 정치에 개입하다 권력 핵심끼리 갈등을 빚어 벌어진 일이다. 10·26 이후 전두환 씨가 중앙정보부장을 맡으면서 나에게 중정 개혁 방안을 마련하라고 했다. 그때 전 씨는 ‘중정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어야 할 이유가 뭐냐. 국내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라. 다시는 10·26 같은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문했다. 그래서 국내파트를 대부분 없애는 방안을 만들어 보고했다. 하지만 얼마 뒤 광주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지자 중정 개혁안을 한시적으로 보류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17년이 흐른 뒤 김대중 대통령 때에 이르러 개혁안을 실행에 옮긴 셈이다.”

사이버 공간에 무수한 간첩 있다

―국정원이 국내 정치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데는 이미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하지만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의 내란음모 사건에서 보듯 종북(從北)세력이 있는 한 국내파트도 필요한 것 아닌가.

“대공 분야와 관련한 국내파트는 필요하다. 하지만 통진당이 북한과 연계된 부분만 감시해야지 통진당의 활동 자체에 국정원이 개입해선 안 된다.”

―그 경계가 모호하지 않나.

“모호하다. 그러니 그때그때 정확히 판단할 현명한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 정부가 헌법재판소에 통진당 해산 심판을 청구한 것은 잘못이다. 자칫 국민의 동정심을 유발할 수 있다. 그들이 더 극렬하게 활동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국민이 등을 돌리고 스스로 타서 없어진다. 일본이나 독일의 적군파가 그런 식으로 사라졌다.”

―국회 주도의 국정원 개혁은 바람직한가.

“야당도 언제든 집권당이 될 수 있다. 집권 후 후회하지 않으려면 국정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혁해야 한다. 각국의 정보기관은 무한경쟁을 벌이고 있다. 일본만 하더라도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신설하고 특정비밀보호법까지 만들지 않았나. 우리 스스로 무장해제해선 안 된다.”

―국정원을 강화한다면 어떤 분야에 힘을 쏟아야 하나.

“심리전 요원을 사이버 요원으로 전환해야 한다. 사이버 공간에는 무수히 많은 고정간첩이 있다. 간첩은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다. 북한이 명령만 내리면 수많은 정보가 빠져나가고 정부 기능이 파괴된다. 우리도 북한 사이트에 들어가 북한을 교란시킬 수 있어야 한다.”

―남재준 원장이나 국정원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북한 사회의 통제력과 내부 결속력이 급속히 약화되면서 국정원이 일하기에는 오히려 좋은 환경이 만들어졌다. 이럴 때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면 무능함을 자인하는 것이다.”

―장성택 숙청 이후 북한의 급변사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김정은이 장성택을 총살하는 것을 보면서 (그런 사람이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미국 중국 등과 함께 북한의 도발에 빈틈없이 대응하면서도 경제 지원 등을 통해 북한 사회의 끓어오르는 김을 빼줘야 한다. 저렇게 방치하면 위험하다.”

인터뷰=이재명 정치부 차장 egij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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