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학회 “국내 관광안내지도 주먹구구식 제작”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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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 표준 디자인 적용 안해… 큰 도로 외에는 도로명도 없고
외국인 관광객들 관심 두지 않는… 은행-학교-우체국 건물만 표시

“경복궁 가는 길인데요. 이 지도는 너무 복잡해서 안 보고 있어요.”

28일 서울 종로구 종로1가 인근에서 만난 중국인 관광객 페이 씨(27)는 서울시가 만든 관광안내지도를 가방에서 꺼내 들며 “유용하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지도만 보고서는 길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이 지도엔 큰 도로 외에는 도로명이 쓰여 있지 않았고, 대신 은행 학교 우체국 등 관광객이 관심을 두지 않을 만한 건물들만 표시돼 있었다. 이처럼 국내 관광안내지도가 국제표준에 맞지 않게 주먹구구식으로 만들어져 실용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전문가들로부터 제기됐다. 한국지도학회는 최근 정기총회를 열고 국내의 관광지도 수준이 해외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는 판단에 따라 정부에 ‘안내지도 선진화’를 제안하기로 했다. 이와 관련해 강영옥 회장(이화여대 교수)은 29일 “내년 인천 아시아경기대회와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등 국제행사에 맞춰 관광지도가 개정될 텐데 이때 제대로 바꿔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지난해 여수 세계박람회에 맞춰 만든 관광안내지도를 보면 문제점이 잘 드러난다. 지도에는 관광객들에게 큰 도움이 안 되는 행정구역이 모두 적혀 있고, 일부 도로는 너무 진하게 표기돼 있다. 여기에 쓸데없는 설명과 사진까지 덕지덕지 붙으면서 정작 박람회장 주변에 무슨 관광지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정부도 몇 해 전 ‘너무 많은 정보’ ‘한글 없이 외국어만 표기’ ‘지도 부정확’ 등과 같은 관광지도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개선에 나선 적이 있다. 하지만 이후에도 사정이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는 게 지도학회의 판단이다. 학회에서 관광지도 문제에 대해 발표한 허갑중 전 한국관광안내센터 소장은 “지도 제작 가이드라인의 구체성이 떨어져 지방자치단체별로 수준 낮은 지도가 무분별하게 만들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는 2009년 관광지도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그러나 2009년 가이드라인에는 ‘지도 크기별 정보의 양’ ‘단위별 글꼴·도로 등 표준 디자인’ 등 실제로 필요한 기준이 들어 있지 않다.

광역·기초단체별로 수준 낮은 지도를 여러 개 만들며 예산을 낭비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허 전 소장에 따르면 내년 아시아경기대회 때 외국인 관광객이 몰릴 인천 중구의 지역 관광지도는 가이드북 안내판 인터넷 등에 각기 다른 형태로 예닐곱 개의 지도가 올라 있다. 인천시 관계자는 “필요에 따라 (지도를) 시가 제작하기도 하고 구에서 따로 만들기도 한다”며 “현재 관광지도가 몇 개나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문체부 관계자는 “다른 나라에 비해 관광지도 수준이 떨어진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아직 해외 사례는 조사해 보지 않았다”며 “가이드라인 개정의 필요성은 공감하지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류원식 기자 rew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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