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책의 향기팀 “아뿔싸, 올해 이 책들을 놓쳤습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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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에 소개 못한 아쉬운 책 10

동아일보 ‘책의 향기’ 담당 기자들 앞으론 매주 100∼200권의 신간이 도착한다. 기자들이 첫 번째 하는 일은 기사화할 만한 책을 고르는 것이다. 선정 작업은 보통 3단계를 거친다. 먼저 기자들은 각자에게 배달된 책을 훑어보고 기사화하지 않을 책부터 솎아낸다. 다음엔 남은 책들 중에서 의미가 깊거나 재미가 남다른 책을 걸러낸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각자가 고른 책들을 놓고 서로의 안목을 견주며 어떤 책을 어느 정도 분량으로 소개할지 정한다. 나름대로 꼼꼼한 과정을 거치지만 정말 좋은 책을 놓치는 일이 어김없이 발생한다. 책의 진가를 못 알아본 경우도 있고, 진가를 알아봤다 하더라도 지면 사정으로 기사화의 타이밍을 놓친 경우도 있다. 한 출판사의 책이 한꺼번에 여러 권 선정되는 것을 막으려다 진짜 좋은 책을 놓치는 경우도 있다. 2013년 그렇게 동아일보가 놓친 아까운 책 10권을 선정했다. 먼저 본보 14일자에 소개된 ‘올해의 책’ 선정위원 37명에게 ‘책의 향기’가 간과했다고 생각하는 책을 꼽아달라고 부탁했다. 그중에서 문화면에서 크게 소개된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어제까지의 세계’(김영사)나 송호근 서울대 교수의 ‘시민의 탄생’(민음사) 같은 책을 걸러냈다. 그리고 3명 이상이 꼽은 20여 권 중 기자들이 정말 뼈아픈 실수로 소홀하게 다뤘다고 생각한 책 10권을 추렸다

이오덕일기
이오덕·양철북

올해로 타계 10주기를 맞은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1925∼2003)이 산골 초등학교 교사 시절부터 숨지기 직전까지 42년에 걸쳐 쓴 아흔여덟 권의 일기를 다섯 권의 책으로 간추렸다. 아이들에게 국민성금 내라고 닦달하던 까칠한 젊은 교사가 순박한 아이들과 동화돼 가며 우리 아이들, 우리 말과 글, 우리 생태환경의 진가에 눈을 뜨고 이를 지키고 가꾸려 분투한 과정이 진솔하게 펼쳐진다. 그가 남긴 책 70여 권의 수원지라 할 만하다. 출판인들의 모임인 ‘책을 만드는 사람들(책만사)’이 선정한 ‘2013 올해의 책’ 대상에 뽑혔다.

     
     
     
     
돈의 철학

게오르그 짐멜·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과 나란히 1900년 출간된 독일 사회학자 지멜의 대표작. 현대인의 꿈으로 전이될 돈에 대한 심층적 사상을 전개한 최초의 책으로 꼽힌다. 돈이 사람들을 천박한 물질문화의 노예로 만들 것이지만 동시에 노동과 투쟁으로부터 해방을 가져와 새로운 정신문화의 토대를 열 것임을 역설했다. 이미 30년 전에 영어번역본 중역서가 출간된 적이 있어 동아일보는 ‘300자 다이제스트’로 소개했으나 의미심장한 내용과 탄탄한 번역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한 달 만에 초판 1500부가 모두 팔려 추가 인쇄에 들어갔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박시백·휴머니스트

2003년 제1권(개국)이 출간되고 10년 만인 올해 전 20권(망국)으로 완간됐다. 한국이 자랑하는 세계기록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아 숨쉬는 대중적 역사만화로 살려냈다. 꼼꼼한 문헌연구를 통해 TV 사극으로 잘못 알려진 사실(史實)까지 바로잡으면서도 800여 명에 이르는 등장인물을 생생한 캐릭터로 포착해 냈다. 조선왕조실록 정사에서 제외되는 고종과 순종 시대까지 아울렀다. 완간 전까지 9년간 60만 부가 팔렸으나 7월 완간 이후 4개월간 40만 부가 팔리며 누적 판매량 100만 부를 돌파했다.

     
     
     
     
미생

윤태호·위즈덤하우스

지난해 1월 웹툰으로 첫선을 보인 뒤 ‘88만 원 세대’의 취업에 대한 기대와 환멸을 폐부를 찌르는 페이소스 가득하게 담아냈다는 격찬을 받은 만화. 지난해 9월부터 책으로 출간돼 올해 10월 전 9권으로 완간됐다. 프로바둑기사를 꿈꾸다 무역상사 계약직 영업사원이 된 청년 장그래의 정규직을 향한 도전이 결국 좌절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조정래의 소설 ‘정글만리’가 중장년 직장인의 지지를 받았다면 ‘미생’은 젊은 직장인과 취업준비생의 지지를 받았다. 책으로 출간된 1년간 누적 판매부수가 50만 부에 이르렀다.

     
     
     
     
나를 빌려드립니다

앨리 러셀 혹실드·이매진

‘감정노동’의 개념을 제시한 미국 사회학자인 저자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난 사생활서비스의 폐해를 날카롭게 분석했다. 웨딩 플래너, 대리모, 베이비시터, 노인 돌보미, 유급 문상객처럼 우리의 인생살이를 대신해주는 이런 서비스가 사생활을 시장 영역으로, 인간관계를 상품관계로 바꿔버려 궁극적으로는 공동체적 유대관계마저 파괴한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인생은 누군가 대신 살아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살아내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새롭게 깨닫게 해준다.

     
     
     
      
유일한 규칙

리링·글항아리

지난해 번역된 ‘전쟁은 속임수다’의 저자(중국 베이징대 중문과 교수)가 같은 ‘손자병법’을 주제로 다뤘다는 이유로 동아일보가 제대로 소개하지 못했다. 하지만 전작 ‘전쟁은 속임수다’가 대중적 강연록이라면 이 책은 반세기 동안 손자병법을 연구해온 저자의 사상이 온축된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현대 중국철학사를 대표하는 후스(胡適)와 펑유란(馮友蘭)의 차이를 명쾌하게 설명한 서문만 읽어봐도 그 내공을 확인할 수 있다. 제자백가 사상을 두루 아우르는 고전 텍스트 분석력도 감탄할 만하다.

     
     
     
      
숫자에 속아 위험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

게르트 기거렌처·살림

독일 막스플랑크협회 인간개발연구소장이 지문 조회와 DNA 검사, 유방암 검진과 같은 일상적 상황에서 사람들이 숫자의 환상에 빠지는 이유를 흥미롭게 소개했다. 올해 통계와 관련한 책자들이 많이 쏟아져 동아일보는 ‘300자 다이제스트’로 소개했으나 선정위원들이 과학 분야에서 간과한 책으로 가장 많이 꼽았다. 이정모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은 “우리에게 제시되는 통계 수치를 우리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숫자로 바꿀 것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고 평했다. 한국출판문화상 번역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다.

     
     
     
      
시를 어루만지다

김사인·도서출판b

시인인 저자가 두보의 한시 춘망(春望)을 우리말로 번역한 김소월의 ‘봄’부터 1975년생 시인 안주철의 ‘밥 먹는 풍경’까지 시 50여 편의 묘미를 함축적 문장으로 소개했다. 사진작가 김정욱의 흑백사진을 곁들였다. 동아일보에 인기리에 연재 중인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의 형제편 격이라고 할까. 10월 출간돼 두 달도 안 돼 초판 2000부가 다 팔리고 추가로 2000부를 찍을 만큼 시 감상문으로선 이례적 판매량을 기록했다. 문인들 사이에서 “시를 읽어내려면 이 정도는 돼야 한다”는 평이 회자됐다고 한다.

     
     
     
     
미야지마 히로시, 나의 한국사 공부

미야지마 히로시·너머북스

2002년 일본 도쿄대 교수직을 포기하고 한국 성균관대 교수로 부임한 저자가 40년간 연구한 한국사 성과물을 담아냈다. 서구 유럽의 역사적 특수성을 동아시아 역사에 고스란히 투영하는 것을 비판하며, 서구나 일본에 앞서 중국은 명대, 한국은 이미 조선시대에 근대를 선취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시각을 식민지근대화론이라 성급하게 비판한 일부 한국사회 지식인에 대한 일침도 묵직하다. 한일 관계가 악화 일로에 있는 상황이라 엇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일본의 역사관을 비판한다’(창비)에 초점을 맞추다 놓친 책이다.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난다

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고려대 명예교수의 첫 산문집이다. ‘협객은 경공술로 날아가도 벼는 천천히 크고 천천히 익는다. 늙은 농부에게는 벼 크는 소리가 들린다는데, 그러고 보면 농부야말로 눈먼 무사 따위에 비할 수 없는 강호의 협객이다’ 같은 감칠맛 나는 문장이 눈에 밟힌다. 유신시대 해외 도서를 구입할 때마다 마주쳐야 했던 우체국 여직원 앞에서 활극을 벌인 사연, 글 청탁을 사양하면서 인사치레로 건넨 말을 놓고 대학생 딸과 벌인 논쟁 같은 일상을 해학적이고 심미적 글쓰기로 녹여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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