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원시 낙원 꿈꾸며 남태평양 간 남자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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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지음/배수아 옮김/315쪽·1만3000원/문학과지성사
실존인물 엥겔하르트 일화 소설로

문명에 염증을 느낀 소설의 주인공 엥겔하르트는 남태평양의 작은 섬 카바콘에서 헝겊 한 조각만 두른 채 나체상태로 생활하고 코코넛 열매를 양식으로 하는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세운다. 사진은 원시 문명을 동경하며 남태평양 타히티 섬에서 작품 활동을 했던 프랑스 화가 고갱의 ‘이아 오라나 마리아’(1891년). 동아일보DB
문명에 염증을 느낀 소설의 주인공 엥겔하르트는 남태평양의 작은 섬 카바콘에서 헝겊 한 조각만 두른 채 나체상태로 생활하고 코코넛 열매를 양식으로 하는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세운다. 사진은 원시 문명을 동경하며 남태평양 타히티 섬에서 작품 활동을 했던 프랑스 화가 고갱의 ‘이아 오라나 마리아’(1891년). 동아일보DB
세계 각지의 식민지 경영을 통해 흘러든 부(富)로 유럽의 풍요와 번영이 영속될 것만 같았던 1900년대 초반. 독일 뉘른베르크 출신의 청년 아우구스트 엥겔하르트는 남태평양에 있는 독일령 파푸아뉴기니 제도의 작은 섬 카바콘으로 떠난다. 그는 이 섬의 유일한 백인. 원주민을 부려 코코넛 농장을 경영하며 얇은 천 한 장 말고는 일절 옷을 안 입는 ‘나체주의’와 코코넛 열매만 양식으로 삼는 ‘코코야자주의’를 실천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듬해인 1919년 이 섬에서 유해로 발견된다.

이 소설은 실존 인물인 엥겔하르트의 일화를 모티브로 삼아 쓰였다. ‘그가 만약 죽지 않고 살아남아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은 지난 삶이 영화화된다면?’이라는 소설적 상상력이 흥미롭다. 20세기 초 유럽 문명이 추종했던 관습과 규율, 효율과 탐욕에 저항해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자발적인 로빈슨 크루소가 되어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세우려 했던 젊은 지식인의 야심 찬 도전은 어떻게 귀결될 것인가.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고 소박하며 금욕적인 삶을 실천하는 엥겔하르트의 이 ‘위대한 고립’ 선언은 당시에도 수많은 지친 영혼들의 눈과 귀를 혹하게 만들었나 보다. 반문명주의와 염세주의, 허무주의, 금욕주의, 목가주의로 빚어진 엥겔하르트를 만나려고 채식주의자 아우에켄스, 피아니스트 뤼트초프 같은 사람들이 섬을 찾아온다. 하지만 엥겔하르트 눈에 비친 이들은 제사보다 젯밥에 눈먼 배신자이거나 자신의 통치권을 노리는 잠재적 경쟁자일 뿐이다. 작가는 자신의 추종자들과도 불화하며 스스로를 절대 고독으로 밀어넣는 주인공의 모습을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돈키호테처럼, 때로는 거룩한 순교자처럼 그려낸다.

소설의 결말부에 온화한 품성과 여린 영혼도 잃고 자신의 실패가 모두 유대인의 음모 때문이라는 망상에 빠져 사는 그를 문명으로 복귀시키는 주체가 새로운 제국인 미국 군인들이라는 설정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제국과 문명에 대한 염증에서 시작된 그의 여정이 콜라와 핫도그로 상징되는 새로운 제국의 품에 안기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의 얘기는 가장 자본주의적 볼거리인 영화의 소재가 된다! 고독한 낙원의 이상과 현실을 그려내다 막판엔 일탈자를 용납 않는 시스템으로서의 제국을 섬뜩하게 그려낸다.

스위스 태생의 독일인인 저자는 소말리아, 인도, 스리랑카, 온두라스, 네팔, 아르헨티나 등 세계 각지를 떠돌며 생활한 사진작가이자 성우이기도 하다. 2006년에는 북한 체류 경험을 바탕으로 ‘총체적 기억: 김정일의 북한’이라는 사진첩을 내기도 했다. 소설가 배수아가 맡은 번역도 매끄러워 술술 읽힌다. 작품 중간 중간 카메오처럼 주인공을 스쳐가는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같은 동시대 독일 문인을 만나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제국#엥겔하르트#실존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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