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乙살리려다 乙죽이는 의원 입법의 역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11일 03시 00분


정부의 경제 활성화 대책이 좀처럼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이유는 상당 부분 질 낮은 규제 법률에 있다. 한국규제학회는 최근 ‘2013년 의원 입법 규제 모니터링’ 보고서를 공개했다. 올해 1∼8월 의원 입법 2995건 가운데 각종 규제를 포함한 법안 513건을 골라 법안의 품질을 평가해보니 100점 만점에 평균 58.4점이었다. 낙제점이다.

저질 규제 법안이 시장을 옥죄면서 혜택을 받을 줄 알았던 사람들이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 골목 상권과 전통시장을 살리겠다며 대형마트를 규제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법을 시행한 이후 전통시장의 매출이 올랐다는 소리는 들리지 않고, 대형마트의 일자리만 줄어들었다.

한국규제학회는 민주당 윤후덕 의원이 대표 발의한 화물자동차 운수사업법 개정안에 24.1점이라는 최하점을 줬다. 화물자동차의 표준 운임을 정해 모든 거래에 적용하는 법안이다. 화물운송비가 원가 이하로 떨어져 생계가 어려운 화물차주를 돕자는 뜻이었다. 하지만 표준 운임을 의무화하면 가뜩이나 공급 과잉인 화물운송업에 신규 사업자가 계속 진입해 기존 차주가 더 힘들어질 수 있다.

우리나라의 상당수 규제 법안은 원칙적으로 금지하되 일부를 허용하는 방식이다. 이런 풍토에서는 새로운 산업이 창조될 수 없다. 역대 정부가 규제 개혁을 역점 과제로 추진한 것도 이런 문제의식에서다. 하지만 결과는 영 딴판이다. 올해 10월 현재 등록 규제는 1만5064건으로 지난해(1만4871건)보다 많고, 2008년(1만1625건)보다는 30% 가까이 증가했다. 정부의 규제 폐지나 완화 속도보다 국회의원들의 규제 입법 속도가 더 빨랐기 때문이다.

19대 국회에서는 규제 입법이 더 증가할 기세다. 19대 국회 1년 반 동안 의원 발의 법안은 7588건으로 17대 국회 5년(6387건)보다 많았다. 경제민주화 요구와 ‘갑(甲)의 횡포’가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른 데 따른 것이다. 정부 입법은 소관 부처에서 규제 영향 분석서를 작성하고 규제개혁위원회를 거친다. 반면에 의원 입법은 아무런 제약이 없다. 무분별한 의원 입법부터 규제가 필요하다. 어설픈 규제가 당초 의도와 달리 을(乙)의 삶을 더 각박하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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