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비 제한-해고요건 강화, 역효과 무시한 ‘質낮은 규제’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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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학회, 의원입법 법안 평가

민주당 이상민 의원 등 국회의원 29명은 4월 16일 선행교육 규제에 관한 특별법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학교뿐 아니라 사설 학원이나 과외교사들에게 선행학습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규정을 어기면 학원 등록이 말소되고 과외 교습이 정지된다.

이 의원은 시민단체인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으로부터 받은 초안을 바탕으로 법안을 발의했다고 한다. 지역구 학원의 표심(票心) 때문에 망설였지만 선행학습을 금지해야 한다는 여론에 힘입어 법안을 밀어붙였다.

○ ‘해결 대신 처벌’이 저질 규제 낳아

선의(善意)로 제출한 법안이었지만 규제학회는 이를 가장 품질이 낮은 규제 법안의 하나로 꼽고 100점 만점에 26.5점이라는 낮은 점수를 줬다. 규제학회 측은 “선행학습이 문제이긴 하지만 부정적인 면만 강조하면 또 다른 폐단을 낳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부모의 교육권이나 학원 교사의 직업 선택의 자유를 과도하게 침해해 위헌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다. 현실적으로 선행학습을 단속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문제 제기도 있었고, 졸업 직전이나 방학 때 앞으로 배울 내용을 공부하는 것도 법으로 처벌할 것이냐는 목소리도 나왔다. 김주찬 광운대 행정학과 교수는 “선행학습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학원을 처벌하면 된다는 식의 규제는 시장에서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맞게 된다”고 꼬집었다.

이 법안에는 교육부와 법제처도 반대 의견을 냈다. 서남수 교육부 장관은 “사교육 분야를 직접 규제하는 것은 개인의 기본권을 과도하게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했고, 법제처도 “과잉 규제 금지의 원칙 등에 비춰 지나치다”고 밝혔다. 이 의원 측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가 적지 않아 방학기간 중 선행학습은 예외로 하거나 선행학습의 범위를 조정하는 등 보완 방안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새누리당 이학재 의원 등 의원 10명이 7월 12일 발의한 유아교육법 개정안도 26.6점을 받는 데 그쳤다. 유치원 납입금 인상률을 직전 3개 연도 평균 소비자물가 상승률 이하로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규제학회는 “억지로 가격을 제한했다가는 유치원 교육의 질 저하 등 또 다른 피해가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법안은 교육부에서 초안을 만든 뒤 의원입법으로 추진하는 이른바 ‘청부 입법’이다. 정부 입법은 법제처와 규제개혁위원회의 사전 심사를 거쳐야 하고 차관회의, 국무회의를 통과해야 하는 등 절차가 복잡하기 때문에 부처들은 의원입법의 형식을 빌려 정책을 추진하는 사례가 많다. 유아교육법 개정안처럼 대중의 인기에 부합하는 내용의 청부 입법은 한 표가 아쉬운 의원들이 거절할 이유가 없어 과도한 규제를 낳는 창구가 된다.

○ 이슈 좇다 보니 대증요법 남발

품질이 낮은 규제 중에는 특수한 경우에만 적용되는 일종의 대증요법(對症療法)이 많다. 사회적으로 관심이 높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안을 서둘러 만들다 보니 무리한 규제가 생겨나기 일쑤다.

기업의 해고 요건을 강화해 경영이 어려워져도 근로자를 내보내기 어렵게 만드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은 대표적인 규제 법안으로 꼽혔다. 이런 규제는 “기업 경영을 지나치게 제한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새누리당 김성태 의원, 민주당 정청래 의원 등이 각각 대표발의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에 거듭 등장한다.

대형 점포의 판매 물품을 제한하는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민주당 이낙연 의원 대표발의), 중소기업·중소상인 적합 업종 보호를 법제화하는 중소기업·중소상인 적합 업종 보호에 관한 특별법안(민주당 오영식 의원 대표발의)도 인기영합주의로 시장의 자율을 과도하게 제한하는 규제로 꼽혔다.

이번 평가에서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화물자동차운수사업법 개정안(민주당 윤후덕 의원 대표발의)은 지난해 10월 민주당 이윤석 의원이 동일한 내용의 법안을 낸 바 있다. 국토교통위원회는 이 법안 논의 과정에서 과도한 규제라는 견해가 나오자 표준운임을 정하되 법으로 강제하지 않고 권고만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그런데 새 법안으로 논의가 원점으로 돌아갈 판이다. 규제학회는 “이슈가 하나 제기되면 비슷한 규제 법안이 뒤이어 쏟아지면서 과도한 규제나 중복 규제로 이어지는 일이 많다”고 분석했다.

이슈를 좇다 보니 엉뚱한 법안을 끌어다 붙이기도 한다. 대통령,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일을 대형마트 의무휴업일로 지정하자는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민주당 신학용 의원 대표발의)은 “근로자의 선거권 보장은 근로기준법 등 다른 법에서 다뤄야 할 내용”이라는 규제학회의 지적을 받았다.

김태윤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여론에 민감한 의원입법은 목소리가 큰 소수의 이해관계가 과도하게 반영되기 쉽다”며 “의원입법을 통해 주요 규제를 만드는 것은 외국에서 찾아볼 수 없는 기형적인 현상”이라고 말했다.

○ 소비자 권익 보호하는 규제는 ‘우수’

규제학회는 소비자 보호를 위해 기업에 새로운 의무를 부여한 규제법안에는 높은 점수를 줬다. 해당 소비자가 원하면 신용카드 비밀번호가 확인된 때에만 거래할 수 있도록 한 여신전문금융업법 개정안(민주당 이종걸 의원 대표발의)은 86.4점으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여행 계약을 한 소비자에게 보험 가입 증명 서류를 제공하도록 한 관광진흥법 개정안(새누리당 이재영 의원 대표발의·85.5점), 인터넷 유통 금지 품목에 마약류를 포함시킨 정보통신망 이용 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새누리당 강은희 의원 대표발의, 85.5점) 등도 호평을 받았다.

한편 한국규제학회는 18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의원입법과 규제 모니터링을 주제로 세미나를 열어 이 같은 내용을 발표할 예정이다.

김용석 nex@donga.com·장원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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