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92>바다 속 마을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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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속 마을
―함성호(1963∼)

눈이 내리는 속초는 바닷가 덕장에 널려 있는, 푸른 명태의 아가미 근처에 있다 아― 하고 벌린 입 미세한 이빨들 사이로 눈이 쌓이고, 그런 날 겨울 바다는 적막이다 명태 아가리에 소복이 쌓인 산송장 같은 눈을 훔쳐 먹으며 아이들이 빈 그물을 흔들고 있다 무너져 내리는 함박눈 맞으며 누군가 환난의 호루라기를 불어 언덕 아래로 뛰어내려온다 사르락사르락 눈 내리는 소리가 낮은 파도 소리와 같이, 얼어붙은 모래사장에서 살을 섞고 있다 긴 목도리를 눈 밑까지 두른 옆집 누나가 슬리퍼를 끌며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다 궂은 날이나 마음 다친 날은 만(灣)을 건너는 사람 없어, 갯배에서 바다로 내린 밧줄 위로도 흰 눈은 쌓이고, 그런 날 속초는 지상에 없는 마을 같다 누군가 아주 멀리서 누군지 모르는 흐린 이름 부르는 소리 들린다 저 배 위로 아무 울림도 없이 흰 눈은 쌓여 바닷가 모래밭과 흰머리 무거운 송림 사이에서 붉은 해당화도 서럽게 설핏, 피다 만 것 같은…… 그런 날 속초는 아가미 호흡을 하는 슬픈 생선 같기도 하다가, 아무래도 그물에서 잘못 건져 올린 죽은 시계 소리 같기도 하다 등대는 뚜우 뚜우 배들을 부르고, 안개등을 흔들며 호응하는 목선이 들어오는 세상의 바다

바다 속 마을에는 흰 눈이 내려, 깊은 바다 속 골짜기에도 하염없이 눈은 내리고, 영원히 발견되지 않을 유물처럼―눈白은 내리고


바닷가 마을 설경이 수묵화처럼 떠오른다. 공중에 함박눈 빽빽이 쏟아지면, 시야가 흐리고 공기가 희박해지고, 시간이 정지되는 듯하다. 깊은 적막을 ‘뚜우 뚜우 배들을 부르는 등대, 안개등을 흔드는 목선’이 서럽게 휘젓는다. 현실감을 잃게 하는 폭설과 함께, 몽롱함 속에서도 놓치지 않고, 현실의 미세한 부분까지 묘사했다. 절실한 정조를 느끼게 하는, 서정적 감수성이 빼어난 시다. 눈 내리는 속초 바닷가에 가보고 싶다. ‘영원히 발견되지 않을 유물처럼’ 태곳적 신비와 침묵이 깃들인 그 ‘바다 속 마을’에.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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