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와 용서… 350년 인종분규 끝낸 세계인권운동 큰별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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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만델라 1918~2013]
‘흑백화합의 상징’ 넬슨 만델라의 95년 인생역정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라는 걸 나는 알았습니다. 용감한 사람은 무서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두려움을 정복하는 사람입니다.”

넬슨 롤리랄라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은 나약한 인간이 용서와 화해를 통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는지 직접 보여준 아름다운 지도자였다.

○ 아파르트헤이트로 갈라진 남아공

만델라는 1918년 7월 18일 트란스케이 움타타에서 템부족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치 않는 결혼을 피해 친구와 함께 요하네스버그로 피신한 그는 친절한 한 백인의 도움으로 포트헤어대에서 공부했다. 하지만 1940년 학내에서의 정치활동을 이유로 퇴학당한다.

1942년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그는 본격적으로 흑인 인권 활동에 나선다. 1943년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가입한 그는 1944년 ANC 청년리그를 만들었다. 특히 1952년 백인이 아닌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요하네스버그에 법률상담소를 열고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 반대 운동에 나서면서 이름을 널리 알렸다. 이 법률상담소는 흑인들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 정권이 1948년 법으로 제정한 인종 분리 차별 정책을 뜻한다. 84%의 유색인종에 대한 16% 백인의 우월주의 정책이었다. 네덜란드 출신 이주자의 후손들이 쓰던 네덜란드어가 변화해 남아공의 공용어가 된 아프리칸스어(語)에서 ‘분리, 격리’를 뜻하는 말이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모든 사람을 백인 흑인 유색인 인도인으로 나눠 인종별 거주지 분리, 통혼 금지, 출입구역 분리 등을 하며 유례없는 백인지상주의 국가를 지향한 정책이었다. 심지어 성행위도 불법으로 규정했다. 그 골격은 영국이 케이프타운 식민지 등에 도입한 통행법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다른 구역으로 이동하려는 흑인에겐 통행증이 필요한 시절이었다.

○ 무장투쟁을 이끄는 전사로 변신

만델라는 1960년 3월 통행법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던 흑인 69명이 무차별 사살된 샤프빌 학살 사건을 계기로 평화적 시위운동을 중단하고 무장투쟁을 이끌었다. 1961년 지하 무장조직인 ‘움콘토 웨 시즈웨’(민족의 창)를 결성해 전국적인 파업을 주도하고 게릴라 활동에 나섰다. 흑인 해방을 위해 무기를 든 지 17개월 만인 1962년 8월 체포된 그는 1964년 6월 리보니아 재판소에서 국가 전복기도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4시간에 걸친 리보니아에서의 법정 진술은 역사의 기록으로 남았다.

“나는 모든 사람이 함께 조화를 이루고 동등한 기회를 누리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에 대한 이상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 사회야말로 내가 살아가는 목적이고 이루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그런 이상을 위해 나는 죽을 준비가 돼 있다.”

수감 기간 대부분을 케이프타운 앞바다에 있는 로번 섬에서 보낸 그의 명성은 점점 커졌다. 심지어 그의 죄수번호인 ‘46664’(1964년에 수감된 466번째 죄수라는 의미)까지 저항 운동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그는 옥중에서 자와할랄 네루상(1979년), 유네스코의 시몬 볼리바르 국제상(1983년)을 받는 등 석방될 때까지 27년 넘게 복역하면서 세계 인권운동의 아이콘이 됐다.

남아공의 대표적인 아파르트헤이트는 ‘반투 홈랜드(Bantu Homeland)법’이었다. 백인 정권은 줄루, 코사족 등 약 10개에 이르는 흑인 부족에 명목상의 자치정권을 수립하도록 했다. 하지만 전체 영토의 약 13%에 불과한 데다 대부분 황무지였던 홈랜드에서 사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 법으로 1960∼1994년 약 350만 명이 생활 터전을 잃고 극빈층이 됐다. 만델라의 석방 이후에야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의 전기가 마련된다.

○ 화해와 평등의 ‘무지개 국가’ 건설을 슬로건으로

72세에 출감한 그는 정계에 복귀한다. 그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실용노선의 창을 들었다. 그는 수감 시절인 1985년 ANC와 별도로 정부와 흑백 갈등 종식을 위한 협상을 추진하기도 했다.

1990년 2월 프레데리크 데클레르크 정권이 탄생하면서 결정적 전기가 마련됐다. 데클레르크 대통령은 만델라를 석방했다. 백인을 향한 무장 투쟁을 외치던 만델라는 수감생활을 마치면서 한 연설에서 “무기를 바다에 버려라”라고 촉구했다.

협상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만들어지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1991년 아파르트헤이트에 관련된 법들은 협상을 통해 평화로운 방식으로 폐지됐다. 만델라는 1993년 데클레르크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이어 ANC 의장이었던 만델라가 1994년 5월 자유 총선거에 의하여 구성된 다인종 의회에서 첫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만델라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뽑히면서 350년 넘게 계속돼 온 아파르트헤이트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만델라의 위대한 면모는 대통령에 선출된 다음에 드러났다.

만델라는 피로 점철된 과거에 대한 복수와 응징이 아닌 화해와 용서를 통한 국민 통합을 택했다. ‘진실과 화해위원회(TRC)’를 만들어 과거 국민당 백인 정부 시절에 일어난 사건들을 규명하되 그 가해자들을 용서했다.

만델라가 정권을 잡고 TRC를 출범시켰을 때만 해도 대부분 흑인은 과거에 대한 단죄를 요구했다. 극도로 긴장한 백인들은 흑인에 맞서기 위해 무장했다. 국제사회는 남아공에서 인종 간 유혈 참극이 벌어질 것으로 우려했으나 이는 기우였다. 만델라의 남아공은 다인종이 공존하는 ‘무지개 국가’ 건설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그는 ‘종신 대통령직’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단호히 뿌리치고 1999년 6월 퇴임했다. 건강 악화로 2010년 남아공 월드컵대회 폐회식 이후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는 올 6월 오랜 수감 생활의 후유증으로 인한 폐 감염증이 재발해 3개월간 입원했다. ‘마디바’(만델라의 애칭)는 그렇게 투병을 한 뒤 세계인의 애도 속에 세상을 떠났다.

○ 비운의 가족사

만델라의 가족사는 바람 잘 날 없었다. 두 번의 이혼을 겪었고 두 아들과 큰딸 등 세 자녀를 먼저 떠나보냈다. 만델라의 장남 마디바는 만델라가 로번 섬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1969년 23세의 젊은 나이로 트란스케이에서 차 사고로 숨졌다. 차남 마카토도 2005년 에이즈로 사망했다. 큰딸은 생후 9개월 만에 숨졌다.

남아있는 자녀들은 재산 분쟁으로 사이가 좋지 않다. 장녀 마카지웨는 첫 부인 에벌린, 둘째 딸 제나니와 셋째 딸 진지스와는 인권 운동 동료이자 두 번째 부인인 위니의 소생이다. 마카지웨와 제나니는 올해 4월 만델라가 수감 시절 그린 그림 및 핸드프린팅을 판매해 벌어들인 수익을 관리하는 신탁기금 두 곳의 경영권을 주장하며 맞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요하네스버그=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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